사상 초유의 실업사태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실질적으로 3백만 실업대란의 시대가
드디어 막을 올리기 시작했고, 체제유지의 마지노선이라고 여겨졌던 실업률 8%선도 함락되기
일보직전인 상황이다.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쌀쌀해지는 요즘에 와서도 줄어들 줄 모르는
노숙자들만 보더라도 굳이 산술적인 근거를 댈 필요가 없을 만큼 실업사태는 심각하다.

그러나 급증하는 실업사태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책은 미온하기 짝이 없다. 정확한 실업자
수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과 사회복지 인프라 구축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졸업과 동시에 신규 실업자로 편입하게 되는 대학생들을 위해 ‘기업
인턴사원제의 활성화’ 정도의 처방이 그나마 눈에 띌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업이 실업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 차원의 문제라는 인식이 대두되면서
실업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실업문
제 해결이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가치체계를 벗어나 다양한 제도적, 정치적 투
쟁을 통해 실업자 스스로 권리를 찾으려는 실업자 운동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15일 국민승리21(대표: 권영길)이 결성한 ‘실업자 동맹 건설’ 역시 실업사태에
대한 조직적이고도 중장기적인 대응방안을 모색중이다. 실업자 조직을 연맹차원으로 이끌겠
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국민승리21은 현 정부의 경제노선이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노선이
라 비판하면서 실업 기금 10조원 확충 및 고용 창출을 위한 주 40시간 노동제 실현 등 구체
적인 실업대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국민승리21의 최규엽 실업대책본부 집행위원장은 뉴스플
러스(9월11일자) 기고문을 통해 “실업자들이 자신들의 절박한 각종 이해와 요구를 관철시
키기 위해서 스스로 각성해서 뭉치고 실업자 동맹등을 결성하는 일은 시민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라며 실업자 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밖에도 청년실업자 10만명 서명운동을 벌였던 ‘청년실업자동맹’, 단일 실업자 조직으로
결성된 전국건설노동조합연맹의 ‘전국건설 일용노동조합’, PC통신을 중심으로 활동중인
‘권리와 행동을 위한 실업자 모임’ 등이 실업자들의 조직화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런 조직적인 실업자 운동의 맹아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여
지껏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실업자들의 조직적 투쟁이 지난해 12월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
로 이어지고 있어 실천이 이론을 추월하는 이례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를 두고 프랑
스의 세계적인 석학 피에르 부르듀(Piere Bourdieu)는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하나의
기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이와 함께 “새로운 차원의 사회운동이 출현”하고 있
다고 진단하면서, “이 운동이 전체 유럽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조직운동으로 발전하기를 희
망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프랑스 실업자들은 대규모 파업이나 시위를 조직하기 힘든 현실조건을 감안, 게릴라식
투쟁을 전개하면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의 선전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97년 말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실업자 투쟁은 ‘실업자들 및 불안정 취업자들의 고용·정보 교
환·연대를 위한 단체(APEIS)’, ‘실업에 저항하는 공동행동(AC)’, ‘실업자들 및 불안
정 취업자들의 국민운동(MNCP)’, ‘평등분배(Partage)’ 등 4개의 단체가 주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뚜렷한 견인차 역할을 할 조직이 불분명한 한국의 실업자 운동은 정부마저 실업자들
을 ‘저항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는 악재까지 겹쳐 적잖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노동자
들의 일방적인 고통감내만이 최선으로 여겨지는 고용대란의 시대. 고통분담을 회피한 채 작
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만을 고집한다면 대규모 실업사태의 극복은 한낮 신기루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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