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봄을 지나, 여름을 부르는 빗소리가 벅차다. 거리를 지나는 여자들
의 옷은 왜 그리도 어둡고 치마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난 화려한 색상의 옷과 짧은 치마
입은 여자들을 보고 싶다. 나의 즐거움을 빼앗아 간 것은 무엇인가. 여성의 옷차림은 시대를
반영한다던가? 1997, 1998년 겨울과 봄, 그리고…. 이어지는 ‘우먼 인 블랙’.

이야기는 1997년 연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하는 이야기의 시작은 거기
에 있기 때문이다. 12월 2일 IMF에 구제금융 신청. 12월 18일, 일부(!) 국민만이 원한 정권
교체. 비록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역사적인 일이었고 그 의미는 컸다.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억압적이었다.

그렇게 새해는 밝았다. 희망과는 거리가 먼. 모든 문제는 IMF라는 세 글자로 통했고, 5살
먹은 꼬마들도 이 단어를 중얼거렸다. 어느 검사가 의견을 냈다는 ‘금모으기 운동’은 한
국민의 애국심을 시험하는 탐지기 역할을 했다. 모든 언론은 마치 가정에 있는 모든 금을
모으면 나라가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는 논리로 연일 떠들어댔다. 금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이 곧 매국노로 단정되던 때. 불과 5개월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의 본론이 될 상반기 우리 문화계는 어땠는가. 그것은 앞의 진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IMF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문화는 전혀 달라졌다. 문화가 변
했다기보다는 문화를 바라보는 주체들의 물질적 조건과 심리 상태가 달라졌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제 문화는 절제의 대상이 되었고,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도
문화는 우리 일상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린 만큼 몇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적으로 대중문화를 살펴보자. 그동안 소비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무한대로 성장하던 대
중문화는 주춤하게 되었다. 소비시장의 축소로 인해 음반이나, 여타 분야는 그 타격이 심각
했다. 김건모, 신승훈 등 최고의 스타들이 음반을 들고 나왔지만,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0대들의 댄스그룹은 그 사이에도 쉼없이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텔레비전의 쇼
프로그램의 축소가 그들의 입지를 조금은 약화시켰다.

대중문화의 약화는 또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문화의 거품 제거가 어느 정도
는 시작된다는 점이다. 특히 올해 들어서 ‘소수문화’의 활발한 진출은 그 예가 될 수 있
다. 극단 ‘마녀’의 성공등은 앞으로 소수문화가 갈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
다. 문화가 현실과 결합해서 어떻게 해석되고,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가 소수문화의
가능성에 달려 있다.

이제 들러야 할 곳은 ‘영화’네 집이다. 2월말 ‘타이타닉’ 개봉은 한국영화의 침몰과 다
름없었다. 최대의 제작비와 미국 최고의 흥행 성적은 우리나라에서 정면승부한다면 그 결과
가 어떨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때 낸 카드가 ‘금모으기운동’과의 한판 승부. 타
이타닉을 60만명이 관람하면 금모으기 운동이 허사로 돌아간다는 말로 인해 모든 국민은 타
이타닉을 보는 것과 안보는 것에서 애국자와 매국노의 갈림길에서 고민해야만 했다.

왜 항상 한국민은 둘의 선택에서 고민해야 하는가. 좀더 많은 상차림에서 고를 순 없을까.
전반전에는 ‘금 모으기 운동’의 우세였으나, 나와 같은 ‘매국노’의 응원으로, 연장전에
가서 ‘타이타닉’의 승리.

4월 들어서 주목할 만한 한국영화 한편이 등장했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 영화계
에서는 최대의 화제를 뿌린 작품이 되었다. 현실을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사람들의 허를 찌
른 감독의 의도는 성공이었다. 그래도 관객은 역시 썰렁. 3천원으로 내린 후에야 그나마 몰
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칸 영화제는 ‘강원도의 힘’과 ‘아름다운 시절’이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우리 영화계를 반성하게 만든다. 한국영화는 유행만 좇지는
않았는가 하는.

영화계의 또 하나의 모습은 공포영화의 등장이다. 코믹잔혹극이라 이름붙인 ‘조용한 가
족’은 정말 조용하면서도 인기를 끌고 있고, 최근의 ‘여고괴담‘ 역시 일상적인 소재로
성공한 경우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보수주의로의 회귀인가? 또한 2월의 서울국
제독립영화제와 6월초 인디포럼, 근래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심야상영은 영화 자체의 확대
뿐만 아니라 시공간의 확장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을 던져준다.

다른 한쪽에서는 옛날을 돌아보면서 한없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불효자는 웁니
다’와 ‘눈물의 여왕’ 등 악극이 등장해서 신파조를 되풀이했다. 과거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는 복고풍과 맞물린 유행이었다. 중년 부부들의 과거에 대한 향수와 현재의
고통의 절묘한 결합. 텔레비전에서는 60년대를 그린 ‘육남매’라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을
붙잡아서 울렸다.

광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투선수 홍수환의 4전5기 장면과 같은 과거의 흑백필름은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붇돋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릿고개를 경험한
어머니들에게는 과거보다는 그래도 현재가 낫지 않느냐는 위로와 격려를, 이후 세대인 젊은
이들에게는 “저런 시절도 있었는데 그렇게 살면 안돼”하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도
상반기 광고에서의 최고의 히로인은 단연 ‘전원주’다.

그녀는 복고풍 광고의 인기를 타고 첫 출연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현대 연예인으로서
는 전혀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외모를 가진 그녀는 그렇게 성공했다. 복고풍 광고는 PCS
광고와 같은 따뜻한 가족주의를 표방하는 광고와 더불어 죽음으로 유혹하는 현실에서 분위
기 쇄신에 일조하고 있다.

문학 쪽을 둘러보면,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이 다 있다. 소설가 황석영씨가 국가보안법으로
수인(囚人) 생활에서 4년 10개월만에 풀려났다. 이것이 기뻤다. 나를 슬프게 한 것은 박노해
등 문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양심수들은 걸어나오지를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하나는 종이값
등 원자재의 상승으로 책값의 상승과 문학시장의 퇴조는 여러가지 문제를 낳고 있다.

상반기 문화계에서 가장 커다란 논쟁은 ‘일본문화 개방’ 문제였다. 일본문화를 개방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PC통신에서는 1천회가 넘는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해묵은 논쟁이자 뜨
거운 감자이기도 한 이 논의는 결국 개방을 하되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압축되고 있다. 지
난 4월 대통령이 개방하는 쪽으로 언급하면서, 자문회의가 발족되었다. 이제 일본문화는 이
후 99년부터 단계적으로 개방될 것이다.

이 논의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방의 찬반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IMF에서 겪는 것과 같은 초국적 자본
의 흐름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제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정
서적인 측면은 식민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논쟁에서 쓸모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세
계적인 정서를 고민해야 한다. 최근 성, 환경 등 국경을 넘는 공통된 보편 주제들이 많은데,
문화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문화정책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민예총등 진보적인 문화예술계에서는 정권교
체가 되면서 새정부 문화정책의 변화를 위한 대안 마련을 위해 고심했다. 그것은 현위기를
단순히 경제 위기로만 보지 않는 혜안을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제안들은 제대로 수렴되
지 않았다. 문화체육부에서 ‘문화관광부’로의 개명. 미숙아의 탄생이었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진보적인 문화예술계에서 그렇게까지 문화정책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자리가 있
었던가. 문화 ‘실제’를 바꾸는 정책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정도면 지난 6개월간의 문화를 빠르게 돌려 본 것 같다. 여기서 잠시 작년 기억을 되살
려보자. 여름에 몰아쳤던 청소년보호법과 만화탄압의 ‘문화검열’은 신자유주의의 모습을
띤 것으로 보였다. 그 광풍은 이제 조금 조용해진 듯하다. 하지만 이 고요는 결코 반길 일이
아니다. 또다른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로 돌아가는 ‘복고’의 이름으로, 지금의 고통은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보수’의 이름으로, 나라와 민족을 걱정해야 한다는 전근대적 ‘충’의 이름
으로, 가족은 어떠한 경우에도 해체되어서는 안된다는 ‘이데올로기’로. 바로 그 중심에 문
화가 있다. 문화는 총칼이나 태풍보다는 물에 가깝다. 조금씩 스며들어 전체를 허물어뜨리는
그런 힘을 가진 무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유하는 자의 것이다.

입에 풀칠 하기도 힘든 세상에 무슨 놈의 문화냐고 반박하는 사람이 많을 지도 모른다. 이
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어떤 문화가 필요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잉여성의 문화가 아
니라 생성과 충만함의 문화이고, 광장을 필요로 하는 다수의 문화가 아닌 소수의 문화이다.
우리의 일상과 삶을 부르고, 그리고, 연주하고, 쓰고, 연출하고, 제작하는 그런 문화를, 이 엄
혹한 시절에 꿈꾸어 본다.

우울한 시대, 1998년 여름의 입구. 프랑스, 그리고 월드컵.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것만 바라보
고 있다.


권경우 <영문학 석사 4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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