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영화, 살아있는 영화

정해진 시나리오 없음. 정해진 배우 없음. 정해진 카메라 없음. 정해진 거
다 없음. 다만 최대한 쉽게 가기로 함.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
으니까.

그들.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거리를 떠도는 혹은 거리로 떠
밀려 난 십대들과 행려들이다. 잘난 사람들이 만든 주류질서에 대한 반발로서
`나쁜영화'를 시작했다는 장선우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신의 아홉번째 작품으로
완성시키면서 또 한번 한국 영화판의 문제적 인간이 되었다. 갈등덩어리로서의
영화, 당대 사회전체와 긴장관계를 이루며 맞서는 영화, 이 때문에 고도로 정
치적인 영화. 장선우 감독은 영화를 통해 현실을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내용과 방식은 매번 바뀌었고 그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97년 `장선우 감독의 필름사고'라는 선전 문구를 달고 나온 `나쁜 영화'
역시 그런 질문의 연장선 위에 있고 그 평가는 어느 때 보다도 다양하게 나오
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논쟁의 경우가 작품자체에 관한 것이기 보다 이
영화를 둘러싼 다른 문제들이 더 초점이 맞춰지고 있어 영화자체를 제대로 보
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영화 내부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는 주인공이 따로 없고, 스타가 나오
지 않으며, 기승전결의 꽉 짜인 구조가 아닌 주류영화 문법에서 일탈해 있는
영화이다. 이렇게 외도를 시작한 카메라는 학교를, 집을, 직장을 잃거나 세상
의 질서와 권위와 억압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을 향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
곳곳을 따라 들어간다. 그렇게 따라가 본길 위에는 가스와 본드의 환각에 빠지
는 아이들, 돈을 벌기 위해 접대부 일을 하는 아이들, 술취한 어른을 때리고
돈을 뺏는 아이들, 같은 또래 여자아이를 윤간하는 남자 아이들, 지하철 바닥
에서 먹고 자며 길바닥에 끌려 갈 때까지 버티는 행려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
리고 이 영화를 선택한 관객은 화면위로 흘러가는 아웃사이더들의 모습에 두시
간 남짓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그런데 공륜은 영화적 맥락을 무시한 채 선정적이라고 판단한 장면을 문제 삼
았고, 결국 필름은 잘라나가 일반 관객들은 흐름 자체가 깨어진 상태로 영화를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심의 마지막까지 책임지지 않은 것에 대해 감독은 과오라고 인정했지만 볼 권
리를 빼앗긴 관객으로선 감독과 제작자에게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
독은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영화가 점점 하기 싫어진다. 재미있자고 하는 건
데 한국 영화판이 재미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카메라의 눈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는 믿음을 갖고 `카메라 인간선언', `열린 영화'를 표방하며 십년 넘게
열정적으로 영화를 만들어 온 한국의 중견 감독에게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은 반가운 일일리 없고 우리의 영화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자본과 시장은 확대되어가고 있지만 영화문법은 점점 상업적 장르영화의 범위
안으로 좁혀지고 검열이라는 검은 손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영화
현실. `나쁜 영화'는 사실 일반에게 공개되기도 전에 무성한 소문들과 검열에
의한 필름삭제로 영화의 제맛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결국 한편의 영화는 영화
자체로서 평가받는 것이다. 이 영화에 `나'의 목소리를 담고 직접 자기들이 에
피소드를 재현해 낸 `나쁜 아이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와 행려연기자들을 카메
라 밖으로 물러나게한 진짜 행려들의 느리고 느린 움직임. 그들이 진짜이기 때
문에 보여줄 수 있었던 `나쁜영화'의 미덕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다시 보여
져야 한다. 지루한 세상 시들시들해진 사람들에겐 살아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

임재원<문화학교 서울연구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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