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1일자 오늘호 한겨레신문 그림판 주제는 `채시라-신성우 파혼'
그린이 박재동. 이 만화에서 한국 최고의 연예인커플로 부러움을 사온 신성
우 채시라가 결혼을 앞두고 돌연 파혼한 사실을 그 특유의 진득한 맛으로 그
려냈다(?).

현재 한겨레신문 그림판에는 박재동이 없다. 8년간의 시사만평을 통하여 한
국신문만화의 지평을 새롭게 전개했던 그는 과감하게(그의 나이는 52년 출생
으로 만 45세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한국애니메
이션동네로 보따리를 싸들었다. 4.3항쟁을 소재로 한 장편 애니메이션 `오돌
또기' 총감독으로의 변신이다.만약에 박재동화백이 아직까지 신문사의 시사
그림판을 담당하고 있다면 앞에서와 같이 `채시라-신성우 파혼'을 다룰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가정하여 본다면 정치성이 유난히 강했던 그의 펜끝이 신문사
에 계속 있었다면 점차 사회성으로, 그리고 생활의 단면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만큼 그의 신문만화는 한국신문만화의 대표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 이전
한국신문만화는 권력에 대한 풍자를 전혀 다룰 수 없었으며 풍자의 수준은 암
중모색 정도의 매우 유약한 방식이었다. 그는 신문만화란 이렇게 통쾌한 것이
다라는 해법으로, 때로는 무협지를 연상하는 그림형태로, 때로는 이야기 중심
의 컷 만화를 보여주는 등 다양한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권력의 심장부를 도려
내듯이 보여 주다가도 정신대 문제를 다룬 `분임이' 형식의 진한 감동과 역사관
을 소리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신문만화가 갖고 있는 딱딱한 한계를 그날 그때마다 매우 발빠른 시사성
을 통하여 아침의 창을 노크했다. 무엇보다 그의 만화가 지식인을 포함한 일반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비결은 그가 의도적인 회화성이나 드라마틱한 과장
을 배제하고 현실문제를 철저하게 왜곡, 변형시키지 않는 솔직함에 있다.

신문만화를 담당하는 작가로서는 드물게 회화성이 강했던 것도 그가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였다. 인물의 스케치가 뛰어났던 그는 인물묘사에서 경향신
문의 김상택과 쌍벽을 이룰 만큼 소묘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서울미대와 같은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으며 한때는 미술교사로서, 화가로서 탄탄한 기량
을 갖추고 난 후에 신문사에 들어왔다.

박재동의 등장은 국민주식회사를 표방하는 한겨레신문사의 신선한 이미지와
맞아떨어져 그의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워낙 기초있는 미술교사 출신이어서
복잡한 기호와 암호로 해독되었던 신문만화의 전형을 과감하게 깨버리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인물중심의 케리커처에서 점차
사회문제 구석구석으로 넓혀지는 주제확장은 매우 자연스런 변화였으며 한국신
문만화의 또다른 발전이었다.

박재동 만화의 특징을 꼽는다고 하면 무엇보다 건강한 만화의 구성력이라고 할
수 있다. DJ의 정치재개 움직임과 기존의 정계은퇴 성명을 당시 유행하던 `간 큰
남자 시리즈'에 비유했던 것이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격적인 은퇴를 따뜻한 시선
으로 그려냄으로써 서태지 은퇴설에 일주일 째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하던 한 여중
생이 박재동화백의 그림판을 보고서야 다시 생활의 의욕을 되찾았다는 학부형의
감사전화는 박재동이 결코 딱딱하고 공격적인 정치풍자만화에만 국한되어 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여 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전격적인 은퇴 만평에는 박재동
특유의 따스한 예술관이 묻어 있어 소개한다.

`떠나는 날 내린 눈은 그대들에게 주마. 원한다면 더 큰 모습으로 다시오렴. 젊음은
짧아도 예술은 기니.'

곽대원<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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