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피의 4월이  지나간 자리. 그 얼룩은 지워지고 거리의 군중은 잠잠해졌지만 당시의 고고한 정신만은 늘 현재형이다. 문학하는 예술가들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던 혁명의식을 살펴보고 현재의 의미를 짚어보자. <편집자주>

▲ 4.19혁명은 문학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중대신문 인터넷뉴스팀
아!  4·19. 4·19 혁명 1960년, 한국학생의 일련의. 반부정, 반정부 항쟁

혁명은 세상을 바꿔놓는다. 그런 점에서 4·19는 분명 혁명이었다. 종래의 잘못된 정치제도와 불합리한 사회적 관습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웠으니, 4·19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지사가 아니다. 그 의의만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혁명은 문학의 흐름도 완전히 바꿔놓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대혁명이다. 프랑스대혁명은 낭만주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리얼리즘 시대가 오게 했다. 혁명은 절대왕정을 공화정으로, 농업사회를 공업사회로, 봉건체제를 자본주의체제로, 귀족사회를 시민사회로 바꿔놓았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스탕달과 발자크의 대표작들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러시아 혁명이 없었더라면 고리키는 <어머니>를, 숄로호프는 <고요한 돈강>을,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4·19혁명은 모더니스트였던 김수영을 일거에 ‘혁명시인’으로 바꿔놓는다. 1960년 4월 19일에 학생과 시민 186명이 사망하고 6천여 명이 부상당하지 않았더라면 김수영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풀>, <푸른 하늘을> <하… 그림자가 없다> 등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신동엽의 장시 <금강>은 4·19에서 시작하여 동학혁명과 3·1운동을 거쳐 다시 4·19로 돌아오는 순환구조를 취하고 있다. 신동엽은 세 가지 역사적 사건을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식의 측면에서 동궤에 놓고 파악했던 것이다.

4·19는 또한, 순수 서정시를 쓰고 있던 대다수 시인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주창하는 시를 쓰게 했다. 언어의 순수성에 집착하고 있던 청록파 3인은 물론이거니와 절대적·관념적 순수서정시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던 김춘수한테도 여러 편의 혁명 기념시를 쓰게 했다.

김춘수의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와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중 후자를 보자.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그대들 가슴 깊은 청정한 부분에
고이고 또 고였다가
서울에서 부산에서
인천에서 대전에서도
강이 되고 끓는 바다가 되어
넘쳐서는 또한
겨레의 가슴에 적시는 것을,
1960년 4월 19일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잔인한 달 4월에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부분

박목월의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 박두진의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와 <당신들은 우리들과 한 핏줄이었다>, 조지훈의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등도 김춘수의 시와 다를 바 없었다.

부정선거 재실시를 탄원하다 죽은 학생들의 영령을 추도하고, 총기 난사로 죄악을 덮으려 한 위정자의 폭력을 규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시인들이 데모 대열에 서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자유와 정의를 외치다 죽은 학생들과 함께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참여적인 시는 거의 써본 바 없는 시인들, 예컨대 구상이 <진혼곡>을, 조병화가 <기는 또다시>를, 박남수가 <불사조에 부치는 노래>를 썼다. 죽은 학생들을 애도하는 마음과 4·19혁명에 대한 시인의 감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4·19는 다음해 5월 16일에 발발한 군사쿠데타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굴절되고 만다. 4·19는 학생을 주축으로 한 혁명이었는데 학생과 시민이 정권의 핵심으로 중심이동을 할 만한 역량을 갖추기 전에 군인들이 혁명의 정신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4·19의 주축세력 가운데 일부가 집권세력에 들어간 것도 혁명의 의미를 감쇄시킨 주요인이었다.

일정한 시간을 가진 뒤 소설 쪽에서 4·19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 4·19의 현장을 직접 다룬 소설로 남정현의 <너는 뭐냐>와 한무숙의 <대열 속에서> 외에 박연희·박태순·신상웅의 소설이 나온다.

 4·19 정신의 좌절과 변질을 그린 소설로는 유주현의 <밀고자>, 오상원의 <무명기>, 이호철의 <4월과 그 뒤안길>, 선우휘의 <십자가 없는 골고다> 등이 있다.

 4·19의 후유증은 시차를 한참 두고서 나오는데, 한상윤의 <떨켜>, 노순자의 <밥벌레>, 이재연의 <봄의 제전> 등을 들 수 있다. 세 부류 가운데 4·19 현장을 다룬 몇 편의 소설은 다시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박연희의 <개미가 쌓은 성>(1962)에는 흥남철수 때 월남한 청소부 아버지와 축구부 주장인 아들이 나온다. 아들은 4·19 때의 총상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아버지는 미쳐버려 2대에 걸친 피해를 다룬 작품인데 도식적인 접근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박태순은 <무너진 극장>(1968)에서 독재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인 학생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폭도들이 군중심리에 의해 극장으로 난입해 불살라버렸다는 식으로 혁명의 정신을 오도하였다.

신상웅의 <불타는 도시>는 4월 19일 당일과 그 다음날까지의 시내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 현장성을 살린 장점이 돋보였다. 4·19 직후 <중대신문>에 실린 이석형 학생의 시를 음미해본다.

오늘 그대들의 죽음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부서지는 햇살마다 일어서는 이마,
정의를 묵살할 수 없었던 이마에서는
이슬에 젖은 슬기가 어린다.
―<민주의 비명(碑銘)을 쓰리라> 부분
 

이 글을 쓴 이승하 교수는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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