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서울’은 모든 분야의 구심점이다. 문화부문 역시 과도하리만큼 중앙에 집
중되어 있기에 지역의 자생적인 문화는 점점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인식아래 각종 지
역문화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나 지역문화를 정책적 지도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중앙정부의 태
도와 지방정부 나름의 문화정책부재로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에 문화부에서는 지
방화 시대에 걸맞게 문화자치를 통한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이룰 수 있도록 지역문화의 재
정립을 위해 이번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지역문화 개념의 재정립
(2) 지역문화운동, 어디까지 갔는가
(3) 지역문화운동의 현장 ‘태백시’

주민자치를 그 핵심으로 하는 지방자치제가 민선 2기를 눈앞에 두고 전국에서 선거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의 지방자치가 실질적으로는 주민자치에 이르지 못하고 선
거로 자치단체장과 자치의원을 선출하는 데서 그치는 민선자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
지만 지방자치제는 이미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새로운 세계관을 심어주고 있음을 부
인할 수 없다. 특히 중앙중심의 세계관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있지만 모든 분야에서 지방
화는 하나의 당위로 인식되고 있으며 지역중심의 사고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민주주의가 정치에서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이제야 제 자리를 잡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역문화도 지방자치제의 실시로 비로소 오랫동안의 질식상태에서 벗
어날 수 있는 계기를 찾았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민주주의도 중앙정치의 폐해가 지역화되는
역기능을 나타내고 있듯이 지방화시대가 아직은 내용적으로 많은 과제와 한계를 지니고 있다.

특히 문화 분야에 있어서 지방화는 매우 불균등할 뿐 아니라 여전히 중앙 중심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의 경우 경제적 낙후에 비해 문화적인 낙후는 훨씬 그 정도
가 심하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문화 관련 예산은 전체규모에서 항상
뒷전이며 그나마도 자치단체장의 업적과시를 위한 일회성 행사에 집중되기 일쑤이다.

지역주민들도 문화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문화에 대한 절박함보다는 지역개발이나 경
제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태백시에서 얼마전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새로운 자치단체
장에게 기대하는 것 가운데 제 일순위는 관광개발이지만 문화예술 진흥은 모든 문항 중에
제일 꼴찌일 뿐 아니라 처참할 정도로 극소수만이 선택하였다. 아마도 극히 일부 지역을 제
외하고는 대부분의 지방에서 같은 여론조사를 실시해 본다면 이와 비슷한 결과를 얻을 것이
다. 실제 지방자치단체나 지역의 문화예술 단체들이 어렵게 마련한 수준 높은 문화행사장은
민망스러울 정도로 텅빈 자리로 우리의 문화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단 매스컴 특히 TV에 자주 나오는 예술인이 오면 사정은 정반대가 된다. 그 역시 지역문화
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조금은 씁쓸한 현상이다. 이러한 지역문화 현실 속에서 문화운
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문화 게릴라처럼 문화불모지를 지키며 지난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스스로 즐겁고 보람있게 여기기 때문에 지역문화현실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버티는 것일 게다.

그렇지만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방자치단체들은 물론 지역주민들마저 지역문화에 무관심하고
저마다 경제개발 제일주의에 빠져 문화를 한낱 장식품으로 여기는 현실이다. 지역 발전을
곧 경제개발로 여기는 경제주의적 사고에서 문화가 자리잡을 공간은 없다. 그러나 문화 없
는 경제개발은 결국 창의성 빈곤으로 자체 한계를 드러내고 발전을 멈출 수밖에 없다.

지역문화의 현실이 이처럼 척박하다는 것은 지역문화를 이끌고 나가는 문화운동단체들의 문
제점도 크고 또 한편으로는 그 토양이 되는 지역사회의 문제와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태백
탄전지역의 경우만 한해서 보더라도 분야별로 문화단체는 있어도 문화운동단체는 실제로 없
다. 문화단체들이 자기만족적인 행사에 안주하고 일종의 문화특권계층을 형성하면서 지역의
문화귀족행세를 하지만 그것은 그네들의 문화일 뿐 지역주민과는 동떨어진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문화운동단체가 비교적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하는 지역에서도 대부분 문화운동에
대한 열의와 헌신성에도 불구하고 항구적인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어 대중적인 영향력과
참여도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문화운동이라는 것이 문화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종교, 교육 등
모든 분야의 총화이기 때문에 여타 사회운동이 함께 발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태백탄전지역
에 일찍이 태백마당이라는 문화운동단체가 88년도부터 대단히 활발한 운동을 펼쳤지만 그것
은 탄광노동운동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여 89년도 이후 석탄산업합리화사업에 의해 수많은
탄광이 폐광되면서 탄광노동운동이 사멸해가자 태백마당은 활동의 기초가 무너질 수밖에 없
었다. 현재 고교생이나 주부들을 대상으로 풍물반을 운영하고 있으나 문화운동의 의미를 이
미 상실하고 말았다.

태백탄전지역을 벽화의 도시로 만들자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뜻있는 미술인들을 통해 마련되
기도 하였지만 시민운동을 비롯한 지역사회의 뒷받침이 미흡하여 진전을 보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문화운동이 결코 홀로 서지 않는다는 소박한 진실을 잘 보여준다. 필자도 미
력한 힘이나마 참여하고 있는 태백 벽화 사업은 그 자체가 태백시민사회의 성숙을 가져오겠
지만 거꾸로 시민운동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숙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사회문화적으로 가장 낙후한 태백탄전지역을 예로 들어서 비교적 문화운동이 활성화되어 있
고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지역과 괴리감이 클 것이지만 대다수 중소도시나 농촌지역에서
는 같은 범주로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지역문화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의 재발견이 시급하다. 지역성이라는 것이
자칫 국수주의적 발상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지역성을 파고들면 그 안에 세계성이 감춰져 있
으며 지역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그 어떠한 것도 세계적일 수 없는 것이다. 민중에 뿌리를
둔 지역성은 매우 건강하며 민중의 힘을 갖고 있는 법이다. 태백에서는 화전민 문화와 탄광
촌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발굴작업이 최근에야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속에 태백지역문
화운동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본다.

지역문화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화만을 고집하며 그 안에 안주하는 문화주의를 벗어나
모든 시민운동과 함께 대중 속에 뛰어들어야 한다. 또한 지역과 중앙을 대립적으로 여기는
과도한 피해의식도 탈피하면서 지역문화의 소박함을 풀뿌리 삼아 열린 문화운동으로 자기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역문화운동을 촌스럽게 여기는 중앙의 오만
함도 물론 버려야 할 것이다. 그 촌스러움이 우리 지역문화의 건강한 토대임을 인정해야 한
다.

원기준<지역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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