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집단위 조정’을 둘러싸고 논의가 분분한데, 지난 18일자 ‘중대신문’에 실린 예술대
학생회와 중대신문의 두 입장은, 그 분분한 논의의 두 축을 보여주고 있다.

‘모집 단위의 조정’을 학부제 실시로 규정·자본 논리의 대학내 도입이란 측면에서 반대
하는 입장이 전자라면, 사회 변화에 따른 도입의 불가피성과 정체 상황의 타개를 위한 개혁
의 일환으로 수용하는 것이 후자의 입장이다. 주장하는 바는 상반되지만, 두 입장 모두 정세
분석에서부터 근거를 제시하고 있음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정세 분석’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사회 변혁을 주장하던 운동체들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은 어떠하고, 이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
며, 이를 위해 어떠한 전술 구사가 합당한가. 요컨대 이러한 틀을 학내 상황에 적용한 것이
바로 중대신문과 예술대 학생회의 논리 전개이다. 그런 점에서 두 입장의 기저에 흐르는 현
실 인식의 방식은 중앙대 학생 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존립할 수 있을까를 가늠케 하는 단서
로도 작용한다.

하지만, 두 입장은 정세 분석 이후의 상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결정적 오류로 작용하고 있다. 먼저 예술대 학생회는 “학부제는 민족
의 자주권이 훼손당하고 외세의 자본 침탈, 교육침탈이 노골화되는 과정의 일환인 교육제도
이다”의 원론적 수준에서 배회하고 있다.

물론 중대신문의 입장에 대한 반테제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모집단위 조정’이
이후 대학 평가의 주요지표로 사용될 점, 교육시장의 해외 개방, 낮아지는 대입 지원자 수
등에 대한 고려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또한 C급 파동, 기초과학센터 31위 사태 등의
역사에 비춰봤을 때, 외부평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역사성도 무시할 수 없다.

중대신문이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중앙대가 가야할 개혁의 길은 기존학
과 중심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학문군을 형성함으로써 물리적 구조를 재구성하고 여기에 중
앙대 특유의 학문전략을 도출해내어 21세기를 겨냥한 특성화된 중앙대를 건설하는 데 있
다.” 변화에의 강변은 있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수사의 차원으로 진행되고 있음
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이러한 방식의 기술은 ‘학교측 입장의 전달자’라는 오해를
빚어내는 요인이며, 학내의 논의 구조를 단지 ‘하자·말자’의 수준으로 전락케 하는 위험
도 제공하고 있다. 마지막에 남는 인상이 ‘본부의 강력한 개혁 실천이 필요하다’(5월 4일
자 사설)는 주장 위에 머무르게 되는 것은 이를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연구 중심 대학’에 대한 논의가 절실히 요청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 집안의
행복과 발전을 지켜가는 데 있어서도 그 집안의 경제적 상황과 가족간의 이해 관계를 떠나
그 책임이 결국 집안 가장의 손에 달려있듯이 대학사회도 그 전통적 관계를 벗어날 수는 없
다”는 식의 가부장제적인 사고나 이에 대한 즉자적 반편향으로 마련할 수 없는 논의의 장
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령처럼 떠돌던 ‘대학원 중심 대학’은 과연 가능한지, 아니
면 취업 중심의 분위기로 학풍을 잡아나갈 것인지, 혹은 교양인 육성을 목표로 할 것인지
등 중앙대의 장기적인 전망은 이 속에서 논의가 가능하다.

이 속에서 중앙대가 타대학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는 점의 제도화를 모색할 수 있으며, 중앙
대의 특성화 또한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93년, 94년 경부터 교수협의회를 중심으로
개최되었던 ‘대학개혁토론회’의 성과들은 ‘모집단위 조정’ 논의 속에서 다시 한 번 검
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물음은 어떤 구체적 전망의 설정 위에서만 의미가 있다. 비로소 방
향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 중심 대학’을 둘러싼 논의가 ‘모집단위 조정’
과 함께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홍기돈<국문학 박사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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