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커닝으로 온나라가 시끄럽다. 140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다. 사람들은 수능관리를 어떻게 했느냐고 시끄럽고, 감독교사들은 어떻게 인생이 걸린 일을 무자비하게 처리할 수 있겠느냐고 시험감독의 어려움을 호소하기 한다. 어떤 학부모는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고 하고, 어떤 교사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라고 신파조로 읍조린다.

참으로 기이하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말하기를 다음 세대를 올바르게 길러내는 소중한 사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교육이 최고봉에 앉아 있는 수능은 완전히 일그러진 괴물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그런 괴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 많은 에너지를 투여했다는 말인가?

교육학을 공부하다보면 미국의 초기 인디언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디언을 개화하기 위해 한 인디언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했단다. 으레 그렇듯이 성취도를 평가하기 위한 시험을 치루는 데 아이들이 각자 문제를 풀지 않고 우루루 모여서 함께 상의를 하더란다. 그래 감독교사가 호통을 쳤더니 아이들은 이렇게 항변했다.

“우리의 어른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함께 협력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함께 어려운 문제를 상의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우화가 과연 사실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경쟁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 사회와 전통사회의 이념적 충돌을 설명하는 매우 상징적인 우화이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미덕으로 가르치며 서로간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시킨다. 학교는 협력과 공동의 이익을 가르치기 보다는 친구들을 싸워 이겨야하는 대상으로 보도록 한다.

특히 우리나라가 그러한데 학교는 더 이상 공익에 봉사하기 보다는 사리사욕을 위한 투쟁의 장으로 변질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인디언 아이들과 같은 협력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현대적인 통신장비를 이용해서 말이다. 두뇌 뿐 아니라 조직력도 감탄할 만 하다. 그러나 그들은 ‘협력과 우애’라는 인간적 가치가 아니라, ‘협잡과 배타’라는 파당적 가치를 추구했다. 우리 교육은 결국 그들에게 파당적 이득을 위해서 ‘협잡과 배타’를 행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과 조직력을 가르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당국의 무능을 탓한다. 그래 그들은 정말 무능하다. 그러나 그들의 무능은 어쩌면 수능을 조직적으로 관리하지 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리사욕을 위해서 ‘협잡과 배타’를 서슴없이 행할 수 있는 아이들을 양산했다는 데 있다. 공공의 협력을 가르치지 못하고 너죽고 나살기 식의 철학없는 교육을 방치해온데 있는 것이다.

그것을 비난하는 학부모들도 할말은 없다. ‘오직 내 새끼를 위해서’ 라는 깃발아래 교육을 풍비박살 낸 것이 과연 누구인가?

이 글을 쓴 김인규씨는 안면중학교 교사로 활동 중입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