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대신문 임효진
      ▲ ⓒ 중대신문 임효진    1

 1403호까지 신문을 넣고 1404호 현관문 앞에 섰을 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 전날까지 '신문 사절-계속 넣으셔도 신문 대금 지불하지 않습니다.'라고 씌어있던 종이가 떨어지고, 대신 이런 문구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식한 놈. 너 신문 사절이란 글자도 못 읽지? 한 번만 더 넣으면 죽는다, 이 개새끼야.'

 물론 그 문구에 의기소침해서 신문을 계속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이 신문을 투입구에 쑤셔 넣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ㅈ일보 쌍문동 지점장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ㅈ일보를 끊으려 하는 일부 독자들의 오판을 바로잡아줄 의무와 사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에게 있어 '한 가구 확장은 곧 생명이요, 한 가구 축소는 곧 개죽음'이라는 쌍문동 지점장님의 말씀은 어느새 내게도 생존의 법칙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 ㅈ일보 쌍문동 점장님의 꺼무뎅뎅하고 넓둥글한 얼굴을 생각하면서 신문을 얼른 삼등분으로 접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현관문 아래쪽에 있는 신문투입구를 열어 젖혔다. 작은 구멍 안에서 우리 점장님의 새까만 얼굴 같은 어둠이 홱 끼쳐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구멍을 신문으로 재빨리 틀어막았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1404호에서 돌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꽤 괜찮았다. 비록 졸지에 '글자도 못 읽는 개새끼'가 되긴 했지만, 나는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일을 멋지게 끝낸 탐정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도 1404호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장 아래 떨어져 있는 ㅈ일보를 본다면, 나의 집념과 끈기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는 대리점에 따지는 것도 이제 그만 지쳐버려서 계속해서 ㅈ일보를 구독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꺼무뎅뎅 점장님은 내 등을 토닥이면서 다시 한 번 '확장은 생명! 축소는 개죽음!'을 외치며 싱긋 웃을 거였고, 나는 '축소는 개죽음, 완전 개죽음'하고 다짐하듯 따라할 것이었다. 정말이지 행복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상상은 얼마 안 가 발기발기 찢겨졌다. 내가 유유히 1404호 앞을 돌아 나올 때 갑자기 끼익-하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나는 그 끼익-하는 쇳소리는 풍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이 새벽에 걸음마 연습을 하러 문을 여는 소리도 아니요, 멀쩡히 자고 있던 재수생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쫓겨나 독서실로 가기 위해 문을 여는 소리도 아님을 금세 알아차렸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1404호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파자마를 입은 한 남자가 문고리를 잡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왼손엔 내가 좀 전에 집어넣은 ㅈ일보가 멱살이라도 잡힌 것처럼 대롱거리고 있었다.

"네가 신문 배달하는 찐드기 새끼냐?"

 남자가 정적을 뚫고 내게 물었다. 나는 내가 그렇다고도 대답할 수 없고 아니라고도 대답할 수 없는 난처한 지경에 처했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ㅈ일보를 배달한 새끼임에는 확실했지만 찐드기 새끼는 아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기로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은 최대한 빨리 모면하고 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남자는 ㅈ일보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1404호 현관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전속력을 다해 복도를 가로질렀다. 물론 나에게 있어 축소는 곧 개죽음이었지만, 당장은 이 사람에게 잡히기만 해도 개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계단을 한 걸음에 세 칸씩 건너뛰었다. 뒤쪽에서는 1404호 남자가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내 목을 조일 듯이 가까이 들렸다가는 멀어지곤 했다. 13층, 12층, 11층, 10층까지 정신없이 뛰는 동안 내가 안고 있던 20부 가량의 신문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남자는 오늘은 정말 나를 끝장내기로 작정한 듯이 끈질기게 쫓아왔다. 남자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남자가 욕하는 소리가 복도에 댕댕 울렸다. 남자의 욕은 다채롭고도 기묘했다. 남자는 한 번 내뱉은 욕은 절대로 다시 반복하지 않았다. 남자와 내가 이 신새벽에 아파트 계단에서 달리기 경쟁을 벌이는 동안 나는 '열리 잘 나르는 날치 같은 새끼'가 되었다가 '귓구멍 막힌 등신'도 되었다가  '그렇게 좆빠지게 달려봤자 얼마 안가 좆나게 얻어터질'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단지 욕만으로도 사람을 기가 질리게 하는 그의 훌륭한 언사에 감탄하며 열심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층마다 켜져 있는 비상등 속에는,  나처럼 땀이 흐르고 숨이 턱까지 차와도, 달리는 것을 절대 멈출 수 없는 불쌍한 초록인간이 다리를 길게 뻗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6층까지 내려왔을 때, 나는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위쪽에서는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소리만이 약하게 들려왔다. 그러더니 남자는 단말마의 비명처럼 이 한 마디 말만을 내뱉고는 다신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신문 넣을 데가 그렇게 없으면 니 똥구멍에나 쳐 넣으란 말야. 알아들었냐? 니 똥구멍에나 쳐 넣어어어―"

 남자의 절규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나는 어쩐지 뒤통수가, 아니 엉덩이 께가 약간 뜨끔한 것 같기도 했지만, 나머지 계단은 최대한 경쾌하게 걸어내려 왔다. 

  13층부터 1층까지 아직 신문을 돌리지 못했지만, 나는 우선은 이 무지개 아파트를 얼른 뜨고 다른 아파트부터 신문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징글징글한 아파트를 나서기 전 나는 경비실 창문 앞에 신문을 하나 던져놓았다. 그러자 경비 모자를 비뚤게 눌러쓴 채 미동도 없이 잠을 자고 있던 경비 아저씨가 ‘아이고, 좋은 아침입니다. 허허헛’ 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마치 지금까지 눈에 불을 켜고 경비를 서다가 반가운 아파트 주민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저씨의 연기는 거의 완벽해 보였다

 "아저씨 나예요, 나.  좋은 아침은 무슨. 정말 똥 같은 아침이에요!"

 경비 아저씨는 눈을 비비며 창문턱에 걸쳐져 있는 신문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런 니미랄. 난 또 관리소장 놈이나 입주자 대표 놈인 줄 알았지. 그 놈들은 요새 도둑고양이처럼 새벽에 경비들 자나 안 자나 감시만 하고 돌아다닌다니까. 웬 젊은 놈들이 없는 게 그렇게 많은가 몰라. 잠도 없고 싸가지도 없거든!" 

  아저씨 말마따나 요즘 무지개 아파트에서는 밤낮으로 경비원의 근무태도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경비원의 근무태도를 트집 잡아서 경비원들을 모조리 없애기 위한 수작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밤에 졸기나 하고 서로 끼리끼리 모여 떠들거나 아파트 청소아줌마와 그렇고 그런 소문이나 나돌게 하는 경비 따위는 이제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늙은 경비원 대신 최첨단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아파트 출입을 완벽히 통제하는 로봇경비시스템을 전격 도입할 거라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주민이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내가 신문 배달하러 가는 길에 슬쩍 훔쳐보곤 하는 주민게시판에서도, 로봇경비시스템의 도입 찬성을 나타내는 빨간 막대그래프의 키는 웃자란 보리처럼 나날이 커져 있었다.  

 "로봇경비? 흥. 철깡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못 하는 일이 있는 게지."

 경비아저씨는 이렇게 비웃었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새벽이면 늘 꺼내놓던 베개와 담요가 경비실에서 보이지 않았고, 아저씨는 졸다가도 작은 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 '아이고 좋은 아침입니다, 허허헛'하고 꾸벅 인사를 하곤 했다. 하루는 도둑놈이 눈치를 보며 경비실 앞을 지나가는 도중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서 '아이구 이런! 좋은 아침입니다. 허허헛'하고 인사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 그 도둑놈이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런 상쾌한 아침은 흔치 않죠.' 하고 맞받아 친 것이지만 말이다. 그 도둑은 아저씨와 ‘이 상쾌하고 좋은 아침'에 대해서 몇 차례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유유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빈 집 세 곳을 깨끗이 털어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로봇경비시스템의 도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근데 어째 오늘은 배달이 빨리 끝났네? 이

           
젠 아주 이군 다리가 자전거 바퀴 저리 가라야? 으허헛"

 아저씨가 비뚜름하게 써져있는 모자를 바로 쓰며 말했다. 그러나 아저씨가 '으허헛'하고 웃는 바람에 모자는 경비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저씨는 끄응 하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모자를 주워들었다.

 "아니에요. 신문 넣는데 1404호 아저씨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도망 나왔어요. 다른 아파트 먼저 돌리고 다시 오려구요."

  "1404호? 아, 거기, 그 놈! 똥 같은 놈이지, 그 놈은! 근데 용케 안 걸렸나봐. 그걸 보면 이군 다리는 자전거 바퀴보다 훨 나은 게 맞다니까. 헛참, 그 똥 같은 놈한테. " 

 똥 같은 놈.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그 똥 같은 놈한테서 용케 도망쳐서  아까 놈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ㅈ일보처럼 패대기쳐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 아침은 충분히 상쾌하고 좋은 아침인 것도 같았다. 나는 그 똥 같은 놈이 그래도 어차피 배달은 된 것이므로, 복도에 내동댕이쳐진 신문을 남몰래 주워들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1404호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배달하기 전에 급하게 먹고 나와 내내 가슴께에 얹혀 있던 생양파와 쌈장, 신 김치와 물에 만 밥알들이 저 아래로 쑥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아저씨, 오늘도 신문대금 좀 받아가야겠는데요. 배가 살살 아프네. 저 화장실 좀 써요."

 나는 오늘치 신문대금으로  허락된 한 평 반 남짓 되는 경비실의 화장실 안으로 얼른 들어갔다. 생양파와 쌈장과 내가 담근 맛없는 신 김치들이 뒤섞여  한 덩어리 똥이 되어 변기로 떨어졌다. 똥덩어리가 떨어질 때마다 잘 익은 열매가 시냇가나 호수에 떨어지는 청명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똥은 굵다랗고 매웠으므로 나는 고통을 느꼈다.

 일을 모두 마친 후  깔끔하게 마무리 작업을 하기 위해 휴지걸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가 휴지걸이에서 하얗고 깨끗한 휴지를 한 웅큼 풀어내려고 했을 때 두루마리 휴지는 내 손에 단 한 칸의 휴지조각만을 남기고는 휴지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아저씨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웬만하면 어떻게 이 안에서 해결해보고 싶었지만, 내 엉덩이는 너무 컸고 휴지 한 칸은 야속하리만큼 작았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여기 휴지가 없거든요!"

 결국 나는 아저씨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새 아저씨는 또 잠이 들어 버린 것 같았다.

 "아저씨, 휴지요 휴지!"

 나는 이번엔 화장실 문을 두드리면서 크게 외쳤다. 그제야 밖에서는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고, 이어 '아이고 좋은 아침입니다. 으헛헛'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저 화장실에 있어요. 휴지가 없다구요."

 나는 마지막으로 아저씨에게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이러한 비보를 전해왔다.

 "휴지? 휴지가 없어? 참! 이놈의 정신머리! 휴지가 다 떨어졌는데도 사다놓을 생각도 못했네. 이놈의 정신머리하고는."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에이 이군, 이군, 걱정하지 말라구. 내가 휴지 만들어준다니까. 휴지 좀 없기로소니 뭐......"

나는 하릴없이 변기에 앉아 아저씨가 제조하는 휴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뭔가를 부스럭거리던 아저씨는 얼마 후 휴지가 될 만한 것을 찾았는지 자신 있게 화장실 문을 열어 제쳤다. 아저씨의 한 손에 들려있는 것은 죽 찢어진 ㅈ일보였다.

 "자, 이 신문을 두 손으로 막 비벼댄 다음에 써 보라구. 그럭저럭 쓰기에 괜찮을 거야. 근데 엉덩이에 상처 나지 않게 많이 비벼서 써야돼. 신문이 아예 부들부들해질 때까지 비비라구."

 아저씨는 내게 찢어진 신문 한아름을 안겨주고는 다시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변기에 앉아서 아저씨가 가르쳐 준대로 손바닥이 뜨거워질 때까지 신문지를 비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지는 곧 부들부들해졌고, 나는 그걸로 뒤처리를 끝냈다. 하지만 아저씨 말대로 그럭저럭 괜찮은 건 아니었다. 너덜너덜해진 신문지는 자꾸만 '그곳'에 들러붙었고, 나는 신문지에 꽁무니만 말라붙어 죽은 바퀴벌레라도 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의 기분을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간 것은, 1404호 남자의 저주가 단박에 실현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정 그렇게 신문 넣을 데가 없거든 내 똥구멍에나 신문을 쳐 넣으라던, 남자의 저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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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대신문 임효진
날마다 밤이면 배달을 나가고 낮이면 잠을 잤다. 아무리 많이 자도 잠은 늘 하염없이 쏟아졌지만, 가끔씩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선풍기 아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되어 단잠을 자고 있는 네로 녀석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 네로는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비통한 인간이 되어 이불 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나는 네로가 나와 놀아줄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정신이 들어야만 천천히 네로의 코와 입에서 양손을 떼었다. 막혔던 숨이 코와 입으로 들어오면 네로는 다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되었다.

  네로와 나는 일년 전부터 이 좁아터진 집에서 함께 복닥대며 살고 있었다. 사실 네로를 처음 만났을 땐 한 집에서 살 만한 인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때 네로와 나는 모종의 계약거래로 맺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 집에서 살고 말고를 생각할 관계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때 우유배달을 하는 네로와 신문배달을 하는 나는 배달이 모두 끝나면 아파트 단지 입구의 머릿돌 앞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때로는 내가 늦게 나타날 때도 있었고, 또 어느 때는 네로가 느지막이 우유 상자가 실려 있는 리어카를 끌고 나타날 때도 있었지만 네로와 나는 언제나 서로를 기다렸다. 물론 서로에 대한 진한 우정이나 변치 않을 의리와 사랑 같은 것 때문은 아니었다. 네로와 나는 만나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약된 거래만을 이행했다. 네로는 우유박스 저 밑에서 흙이 조금 묻어있는 복숭아맛 요플레를 꺼내 주었고, 나는 네로에게 하나 남은 스포츠 신문을 건네주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배달하는 내내 간절하게 원하던 스포츠 신문과 요플레를 손에 쥐면, 네로와 나는 서로 조금 떨어져서 보도블록 끄트머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나는 일회용 숟가락으로 요플레를 입에 떠 넣고 오물거렸고 , 네로는 땅바닥에 스포츠 신문을 펴놓고는 가슴과 거기만 가린 사랑스러운 여자연예인들의 사진을 찾아 모험을 떠났다.

 네로와 나의 거래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따금 네로가 복숭아맛 요플레가 아닌 딸기맛이나 파인애플맛 요플레를 가져오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그럴 때면 나도 스포츠 신문에 약간의 제재를 가함으로써 거래는 무사히 성사되었다. 네로가 고개를 숙인 채 딸기맛이나 파인애플맛 요플레를 내밀면,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스포츠 신문을 재빨리 훑어보고는 오늘의 최고 글래머를 찾아내어 그녀의 사진을 가차 없이 쭉 찢어냈다. 네로는 의연한 척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지만 네로의 얼굴은 어느 새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흙빛이 된 네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늘의 글래머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가 네로를 우리집에 데려온 그날도 우리의 거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었다. 아니 적어도 처음엔 그런 것처럼 보였다. 보도블록에 앉아서 나는 천천히 요플레를 떠먹었고 네로는 스포츠 신문 속 글래머들의 가슴에 푹 빠져들고만 싶은지 신문에 코를 들이박다시피 하고 있었다. 요플레는 늘 그랬듯 달콤하고 부드러웠으며, 요플레 속 복숭아들 사이로 하루의 시작인지 끝인지 모를 것이 둥실둥실 떠가고 있었다.

 나는 요플레통까지 혀로 말끔하게 핥아먹은 다음 보도블록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저쪽에서 신문에 코를 박고 있는 네로가 어쩐지 이상했다. 내가 요플레를 먹어치우는 동안 신문을 한 장도 넘기지 않고 신문 한 면에만 코를 박고 있었던 것은 그저 심하게 감동적인 글래머 한 명이 오늘 자 신문에 등장했나보다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가만 보니 신문만 넘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로는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저…거기…집에는 안 가나?"

 나는 혼잣말도 아니고 물어보는 말도 아닌 이상한 어투로 네로에게 말을 건넸다. 네로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신문위에 떨어진 말똥구리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을 뿐이었다.

 "음…거기…뭔가 상태가 좋지 않다면 내가 도와 줄 수도 있는데 말이지……"

 나는 네로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네로의 발밑에는 스포츠 신문이 펼쳐져 있었고, 그 스포츠 신문 속에선 사랑스러운 여인들이 손바닥만한 옷을 걸친 채 눈부신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가히 오늘의 최고 글래머라고 할 만한 여자연예인의 사진이었다. 그녀는 비키니를 입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비키니는 그녀의 젖꼭지만을 간신히 가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잠시 경의를 표하고는 그녀의 가슴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풍만하고 아름다운 젖가슴이 서서히 검게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젖가슴에 하나둘씩 검은 반점이 생겨나더니 마침내 그녀의 가슴이 뻥 뚫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새까맣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신문에서 고개를 들었다. 네로가 고개를 숙인 채 신문에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네로의 손목을 붙잡고 좁아터진 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네로는 한 손에 스포츠 신문을 꼭 쥐고서 순한 어린애처럼 나를 따라왔다. 방에서 나는 네로에게 약간의 식사를 대접했다. 물론 메뉴는 생양파와 쌈장, 그리고 내가 담근 신 김치였다. 네로는 군말 없이 잘 먹었다. 나는 네로 옆에서 양파만 몇 개 집어먹으며 잘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열 대쯤 후려치자 텔레비전은 지직거리며 흐릿한 화면을 내보냈다.   내가 저쪽에서 밥을 먹고 있는 저 묘한 아이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바로 그때였다.

 "내 이름은 이민철이야. 근데 넌 이름이 뭐니?"

  나는 신중하게 물었다.

 "나는 네로라고 해."

 그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폭군 네로 황제 말하는 거야?"

 나는 다시 물었다.

 "설마.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 말이야. 내 이름은 네로라고 해."

 그 대답을 들은 순간, 나는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살짝 미친놈을 내 방에 들여놓은 건 아닌가 싶어 눈이 번쩍 뜨였지만 이미 모든 건 늦어 있었다. 나와 네로는 함께 살기로 했고, 밤이 되면 서로를 깨워 배달을 나갔다.

 때로 나는 우유 상자를 나르고 있는 네로에게 정말로 너의 본명은 뭐냐고 물어 보기도 했다. 그러면 네로는 언제나 미친놈 같은 눈빛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내 이름은 네로라니까. '플란다스의 개'의 네로야. 네로."

 나는 설사 너의 본명이 삼식이나 개돌이일지라도 너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네로에게 일러두었지만 네로는 끝내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나와 네로는 밤마다 열심히 신문과 우유를 배달했다. 나도, 네로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따금 나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돈을 버는 건지,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젊음을 이 돈버는 일에 쏟아 부어야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네로는 배달하고 남은 우유를 대접에 부어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말했다.

 "우유배달을 해서 돈을 모으면 말이야. 난 파트라슈 같은 개 한 마리를 살 거거든. "

 나는 그건 정말  '네로'같은 발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파트라슈 같은 개는 잡아먹어도 별로 맛이 없을 거야.  내 생각엔 털 뽑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릴 걸. 사람이 먹고 살기에 적당한 것은 역시 한국 똥개만 한 게 없지. 차라리 똥개를  사는 게 어때?"

 네로는 나 같은 것 따위와 대화하려는 것은 아니었다는 듯 멍하니 다른 곳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파트라슈를 사면 내 우유 리어카를 끌게 할 거야. 내 파트라슈는 리어카를 아주 잘 끄는 개가 될 거야."

 네로의 목소리가 꿈에 젖은 듯 아름답게 들렸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럼 만화 플란다스의 개에서처럼 너의 파트라슈는 우유 리어커를 끌고,  네로 너는 뒤에서 리어카를 미는 거야?"

 네로가 다시 꿈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쳤냐? 밀긴 뭘 밀어. 나는 리어카 위에 올라타는 거야."

 불현듯 나는 미래에 네로에게 팔려올 파트라슈 한 마리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파트라슈와 함께 우유배달을 해서 돈을 더 많이 벌면 뭘 할 건데?"

 "파트라슈 암놈을 한 마리 사들여서 둘이 접붙일 거야."

 "왜? 새끼를 치려고?"

 "응. 새끼를 한 4500만 마리쯤 볼 거야."

 "파트라슈의 새끼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로구나?"

 나는 다시 네로에게 감동하였다.

 "아니. 4500만 마리 파트라슈한테 전부 다 리어카를 끌게 할 거야."

  4500만 마리 파트라슈를 가지고 무얼 하든 간에 파트라슈를 단 한 마리라도 사기 위해서 네로는 열심히 우유배달을 해야만 했다. 우유도 신문만큼이나 확장은 어렵고, 우유를 끊으려 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만 갔다. 네로와 나는 각자의 대리점 점장님 말씀을 받들어 가구수 확장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낮에 하염없이 잠을 자거나 코와 입을 틀어막으며 놀 수 없었다. 네로와 나는 낮이면 아파트 단지를 돌며 신문과 우유를 판촉 하러 돌아 다녔다. 네로의 손에는 언제나 선풍기와 다용도 그릇셋트가 들려 있었고, 내 손에는 조립식 산악자전거와 믹서기가 들려 있었다.

 "아주머니 ㅈ일보를 구독하세요. 히말라야 산맥도 거뜬히 오를 수 있는 성능 좋은 산악자전거를 드려요. 자전거가 필요 없으시면 100년 묵은 통나무도 5초면 즙을 내 버리는 믹서기도 있답니다. 깨끗하고 맑은 소리- 온 국민의 1등 신문 ㅈ일보를 구독하셔요."

 나는 열리지 않는 현관문 앞에 서서 외쳤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지만 내 말이 끝나면 네로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소리 질렀다.

 "아주머니, 사람은 머리통은 안 채워도 살지만 배때지는 반드시 채워야만 살 수 있지요. 여기 영양만점 완전식품  우유를 배달해 드시면 어떨까요. 소새끼도 먹고 싶다고 움머움머 울부짖는 ㅅ우유, ㅅ우유를 파격가에 배달해 드립니다. 선풍기나 다용도 그릇 셋트도 드린대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찬스-하얀 마음 하얀 세상 ㅅ우유를 드세요."

 나는 네로에게 여기는 홈쇼핑하는 데가 아니라고 나지막하게 충고했지만, 네로는 손을 휘저으며 '하얀 마음 하얀 세상'을 부르짖었다.

 그렇게 대개 우리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신문과 우유, 그리고 산악자전거, 믹서기, 선풍기와 다용도 그릇세트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사실 우리 자신도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반나절 내내  아파트 복도를 걸어 다니다 지쳐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을 때면, 네로와 나는 종종 쭈쭈바를 사들고 경비 아저씨에게 놀러 갔다. 우리가 갈 때마다 아저씨는 빨간 머리띠를  동여맨 채 이를 갈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아저씨에게 몰래 다가가서 아저씨의 볼에 차가운 쭈쭈바를 갖다대었다. 그러면 아저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깡통 경비 반대!' 하고 외치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저씨는 느닷없이 찾아온 사람이 네로와 나라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서도 한참동안을 푸들푸들 떨었다. 아저씨의 빨간 머리띠 너머에 보이는 주민게시판에서는 로봇경비시스템 도입을 찬성하는 막대그래프의 키가 어느새 50% 표시선을 훌쩍 넘어 있었다.     
 
 네로와 나는 아저씨의 떨리는 손에 조용히 쭈쭈바를 건네주었다. 껍질을 까서 쭈쭈바를 입에 물면 아저씨는 그제야 조금은 진정이 되는지, 다음부터는 쬬코맛 쭈쭈바를 구해오도록 애써보라며 우리를 격려했다. 우리는 사실 그럴 맘이 없으면서도  아저씨에게 최대한 노력해보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 번에 아저씨를 찾아갈 때도 똑같은 슈퍼마켓에서 아무 쭈쭈바나 골라들고 경비실에 들어갔다.

 밤새 경비실을 헐어버리려고 하는 놈들과 맞서느라 진이 다 빠졌다는 아저씨는 언제나 의자에서 이를 갈며 졸고 있었고,  네로는 또 아저씨의 볼에다 시원하고 단단한 쭈쭈바를  대었다. 그러면 아저씨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넘어뜨린 다음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이 니미랄 놈들아 철깡통 경비보다 내가 오십 배는 더 경비를 잘 선단 말이다! 깡통 새끼가 도대체 뭘 할 수 있겠어? 아무 것도 못 한다구.  아무 것도."

3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것은 없었다. 네로와 나는 온종일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다.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네로는 ㅅ우유와 선풍기와 다용도 그릇세트에 대하여, 또 인간은 배때지를 채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슬픈 진실과 소새끼의 울부짖음, 또 하얀 마음 하얀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몹시 더운 날씨였고 나는 산악자전거와 믹서기가 너무 무거워서 헐떡거렸다.

  나는 이깟 자전거와 믹서기 따위는 쓰레기통에 쳐 넣고 쭈쭈바나 사서 경비아저씨한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로의 말이 끝나면 나는 현관문 틈새에 바짝 다가서서 1등 신문 ㅈ일보에 대한, 아니 히말라야 산맥을 기어오르는 산악 자전거와 100년 묵은 통나무를 단숨에 즙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비한 믹서기에 대한 이야기를 고래고래 떠들어대야만 했다.

  그 결과 그날 네로와 나는 아파트 경비원에 의해  세 번 밖으로 끌려 나갔고, 현관문을 열고 나온 우락부락한 남자들에게 열 대쯤 뺨을 맞았으며, 필요 없으니 당장 꺼져 버리라는 말을  쉰 번 정도 들었다. 그리고 약 이백 번쯤은 아무도 열어주지 않는 문 앞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미친놈처럼 차례로 중얼거리다 맥없이 문 앞을 떠났다.

 그 지독한 하루가 겨우 끝났을 때, 네로는 뺨을 매만지며 깔깔 웃었다. 또 나는 그 옆에서 '이 쥐새끼 같은 자식들, 당장 꺼져 버리지 못해? 꺼져 버려! 어서 꺼져버리란 말야'하면서 아파트에서 만났던 못생긴 아저씨들의 흉내를 내었다. 네로는 그런 나를 보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가 다시 붉은 뺨을 매만졌다가 하면서 비틀비틀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네로는 너무 웃었더니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 땐 화장실에 가서 똥을 누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네로는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라면서 경비아저씨에게 들르자고 했다. 네로 녀석도 경비아저씨의 화장실만큼 똥을 누기에 안락한 곳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네로와 나는 항상 그랬듯이 슈퍼마켓에서 아무 쭈쭈바나 사들고 아저씨의 경비실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네로와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저씨의 경비실은, 그리고 우리가 똥을 누었던 안락한 화장실이 있던 곳은 흡사 거대한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경비실 앞은 소음과 낯선 사람들과 먼지와 기계들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성난 얼굴로 무언가를 명령하고 있었고, 러닝셔츠만 입은 인부들이 거대한 기계에 올라앉아 굳은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팔짱을 끼거나 먼지가 코에 들어가지 않도록 한손으로 코를 막은 채 이 난리통에서 얼마쯤 벗어난 곳에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심지가 굳은 몇몇 사람들이 뭔가를 결심한 듯 경비실 앞쪽까지 다가가기도 했지만 그들은 성난 얼굴을 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석유곤로나 선풍기 등을 몰래 들고 나올 뿐이었다.

  소음과 먼지와 성난 사람들과 무관심한 사람들 틈에서 내가 아저씨를 발견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저쪽 구석에서 아저씨는 건장한 두 사내에게 번쩍 들려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헐지 마라, 이 씨팔놈들아. 헐지 마. 누구든지 경비실 모서리라도 뭉개놓는 날에는 나한테 밟혀죽을 줄 알아라. 건드리지 말란 말이다. 이 망나니 같은 놈들."

 아저씨는 땅에 두 발도 대지 못한 채로 두 사내에게 번쩍 들려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와 네로는 먼지를 헤치며 아저씨를 쫓아갔다. 하지만 이내 아저씨는 먼지와 성난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아저씨가 어디에 버려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멀리서 거대한 기계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작은 경비실을 꽝당꽝당 때려 부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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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대신문 임효진
  "거참, 한 마디로 말하면 돌대가리죠. 아니 제가 그렇게 일렀는데도 오늘 또 신문을 넣었단 말씀이세요? 아, 예예. 물론이죠. 이번엔 단단히 주의하겠습니다. 무지개 아파트 1404호요. 네, 아 저는 넣지 말라고 그렇게, 그렇게 얘기를 해도 그 돌대가리 새끼가 자꾸 신문을 갖다가 넣네요. 예. 좀 저능아라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구요. 예예. 그래도 오늘자 신문대금까지는 계산해 주셔야……, 저희 대리점 부수가 있으니까요. 예예. 오늘 것까지만 제가 깨끗하게 계산하겠습니다. 네? 한 번만 더 넣으면 그 녀석 골통을 부숴 버릴지도 모르겠다구요?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하하핫. 제가 다시 한번 그 돌대가리에게 말해두겠습니다. 그럼 끊습니다."

 신문 사이에 광고를 끼어 넣다 말고 나는 우리 꺼무뎅뎅 점장님의 얼굴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점장님은 조금 민망했는지 괜스레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이고 참 . 이 1404호 새끼는 완전 독종인데. 낮에 계속 전화 안 받고 버텼더니만 이 밤에 다른 번호로 전화를 해 갖고 지랄을 하네.  흠……아무래도 1404호는 띠어 줘야 되려나? 흠흠……이군아. 오늘 딱 하루만 더 넣어보고 말이지. 계속 지랄하면 그냥 포기하자. 깨끗이. 그래도 확장은 곧 생명이요, 축소는 개죽음 아니겠어? 한 번은 더 해봐야지. 안 그래, 이군아?"

 나는 계속 광고를 끼워 넣으며, 대답 대신 '확장은 생명, 축소는 개죽음'하고 크게 외쳤다. 우리 꺼무뎅뎅 점장님은 대답보다는 그 구호를 훨씬 좋아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대답이고 구호이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늘은 또 어떻게 1404호에 신문을 밀어 넣을까 하는 것만을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고 있었다.

 지난 번 1404호 남자에게서 가까스로 달아난 이래 1404호에 신문을 넣는 것은 거의 전쟁에 가까운 일이었다. 1404호 앞에 서면 나는 조용히 신문 투입구 앞에 쪼그려 앉아서 덜그럭거리는 소리 없이 얌전하게 신문투입구를 열어야 했다. 그리고는 그 새까만 어둠 속에 신문을 쑤셔 넣어야만 나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언제나 신문투입구는 해골이 뭔가에 짓밟힐 때처럼 빠각빠각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려서 내 심장을 쥐어 뜯어놓았고, 만신창이가 된 심장을 겨우 달래어 신문을 밀어 넣으면 먼저 배달되어 있던 1리터짜리 우유가 철푸덕 쓰러져서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이 짓도 오늘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난 조금 용기가 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내가 배달해야 할 신문들을 껴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지막 전쟁을 위해  대리점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내가 존경해마지않는 꺼무뎅뎅 점장님이 오늘부터 무지개 아파트는 로봇경비시스템이 가동되니, 암호를 잘 알아두고 배달을 나가라고 소리쳤다. 암호는 76453289. 나는 칠육사오삼이팔구 칠육사오삼이팔구 하고 따라 왼 뒤 '확장은 생명, 축소는 개죽음'을 마지막으로 한 번 중얼거리고 대리점을 나섰다.
  나는 신문 리어카를 끌고 아파트 단지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 전쟁을 치러낼 무지개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그날 무지개 아파트는 몹시 이상하고 기묘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경비실을 떼어 내어 버린 대신 아파트는 깨끗한 유리문으로 현관을 감싸고 있었고, 그 유리문에는 단단하고 견고해 보이는 커다란 철통을 매달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것은 누군가에게 젠체하고 싶어 몸에 좀이 쓸 지경인 재수 없는 사내처럼 보였다.

 나는 그 재수 없는 사내에게 다가가 그의 배꼽을 꾹꾹 눌러주었다. 열두 개의 은빛 배꼽을 가진 그 재수 없는 사내는 내가 칠육사오삼이팔구를 정확히 누르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얼른 유리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재수 없는 사내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어서 오십시오. 행복과 사랑이 함께 하는 무지개 아파트입니다.'하고 쇳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뒤돌아서 너같이 신문도 못 읽고 쭈쭈바도 못 먹는 깡통 새끼는 필요 없다고 외쳤다. 재수 없는 사내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14층에 내려섰다. 1403호까지 신문을 넣고 1404호 앞에 섰을 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이제 오늘로써 정말 마지막인 것이다. 나는 무릎을 모으고 현관문 아래쪽의 신문투입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정적을 깨고 신문투입구를 열었다. 마지막을 기념하는 세레모니라도 하듯이 신문투입구의 해골은 보통 때보다 더 크게 빠각거렸고, 신문을 밀어 넣자마자 1리터짜리 우유는 철푸덕 하며 장엄하게 쓰러져갔다. 나는 조심스레 신문투입구를 닫고 일어섰다.

 그렇게 나는 1404호 앞을 천천히 떠나왔다. 복도 난간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 저 비둘기들도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이 높은 곳까지 날아와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일 터였다. 언젠가 네로는 서울 시내 노점상에서 파는 닭꼬치들 중 절반은 비둘기를 지져서 꼬챙이에 찔러 넣은 거라고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네로와 나는 천 원짜리 닭꼬치를 사서 둘이 나눠 먹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네로에게 우리가 먹고 있는 이 닭꼬치는 닭인지 비둘기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네로는 자기 생각엔 아마도 비둘기 쪽에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복도 난간에서 졸고 있던 비둘기 두 마리에게 그때 너희의 친구를 한 마리 먹어치워서 미안하다고 속삭여 주었다. 그때 네로와 나는 너무 배가 고팠다고.

 난간에서 졸던 비둘기들이 닭꼬챙이라도 본 것 마냥 화드득 날아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1404호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남자가 눈을 닭꼬챙이처럼 흘겨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저 비둘기들과 함께 나도 이 장소를 황급히 떠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3층, 12층, 11층, 10층……각 층의 비상등 속에서는 나처럼 죽도록 뛰기만 해야 하는 불행한 초록인간들이 거기 오랜만이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에겐 그들과 재회의 인사를 나눌 만한 여유가 없었다. 대망의 6층까지 내려왔지만, 1404호 남자는 '넌 오늘 죽는 거야, 이 개씨발놈아'를 외치면서 계속 쫓아오고 있었고 내 다리는 이제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겁에 질려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내 다리가 단단히 겁에 질려버려서 포기하지 않고 1층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 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겁에 질린 내 다리 덕분에 나는 결국 1층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나는 현관을 감싸고 있는 유리문에 몸을 부딪쳤다. 달리기 경주에서 1등을 한 선수가 우승 테이프를 끊을 때처럼, 나는 유리문을 힘차게 박차고 나가 승리의 미소를 지을 작정이었다. 나는 바람같이 날아와 유리문에 몸을 부딪쳤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나는 바람 빠진 탱탱볼 마냥 맥없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런 내 모습이 우습다는 듯 재수 없는 유리문 사내는 '야간경비시스템 작동중이오니 암호를 입력해주십시오'하고 느끼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서 1404호 남자가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고 '잡히면 죽는다아 이 개애씨바알노옴아'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나는 별로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대리점에서 몇 번이고 외워두었던 출입문 암호는 한 자리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되는대로 아무 숫자나 누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암호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일이삼사오육칠팔도 눌러보고 유리문밖에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번호를 조합해서 눌러보기도 했다. 나의 생년월일, 네로의 생년월일, 내가 신문배달을 처음 시작했던 날, 내 나이, 네로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번지수 등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숫자란 숫자는 모조리 눌러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재수 없는 유리문 사내는 '암호가 틀렸습니다'하고 빈정거렸다.

 그날 나는 끝내 유리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고 1404호 남자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정작 나를 붙잡았을 때 1404호 남자는 단 한 마디 욕도 내뱉지 않았고, 내가 얼마나 얻어터질 예정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미뤄두었던 이불빨래를 하듯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바닥에 깔려있는 나를 작신작신 밟아나갈 뿐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그건 우리 꺼무뎅뎅 점장님이 시킨 일이었어요'라든가 '으악! 제발 살려주세요. 전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어요' 같은 구질구질한 하소연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몇 번인가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유리문에 매달린 번호판에 손을 내밀어보긴 했었다. 그러나 내가 번호 한 자리를 누르기도 전에, 1404호 남자는 내 손을 질근질근 밟아서 으스러뜨려 놓았다.

 미뤄오던 이불빨래를 말끔하게 끝낸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유리문 옆에 얌전하게 누워서 그가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 1404호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남자가 돌아간 후, 나는 으깨진 손으로  유리문에 몇 개의 암호를 더 입력해보았다. 재수 없는 유리문 사내는 계속해서  '암호가 틀렸습니다.' 하고 근엄하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이 재수 없는 사내와 씨름하지 않기로 하였다. 얼마 후면 네로가 리어카를 끌고서 무지개 아파트에 우유를 배달하러 올 것이었고, 그러면 나는 암호 따위를 몰라도 얼마든지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나는 유리문에 기대어 네로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네로는 무지개 아파트에 정말 늦게 나타났지만, 나는 네로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나는 네로에게 혹시 오늘은 복숭아맛 요플레를 조금 일찍 먹을 수 없냐고 물어 보았다. 네로는 내게 깨끗한 복숭아맛 요플레를 꺼내주었고, 나는 피가 곤죽이 된 채 무지개 아파트 유리문에 기대서 복숭아맛 요플레를 떠먹었다. 네로는 장부책으로 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며, 대체 지금 요플레가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어가고 있긴 한 거냐고 물었다. 나는 으깨진 손으로 목을 한 번 만져보고는 다행히 요플레가 새고 있진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요플레를 다 먹고서 나와 네로는 무지개 아파트를 나왔다. 암호는 간단했다. 칠육사오삼이팔구였다. 칠육사오삼이팔구-나는 이깟 암호 때문에 저 재수 없는 유리문 사내가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가 1404호 남자에게 얻어터지는 것을 보고도 그저 암호가 틀렸다는 소리나 지껄이며 그것을 구경하고만 있었다. 나는 저 재수 없는 유리문 사내를 벌해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단에서 돌을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 돌로 재수 없는 유리문 사내를 맘껏 두들겨 주었다. 유리문이 웬만큼 부서지자 긴 경보음이 무지개 아파트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숨 막히는 사이렌 소리가 무지개 아파트 쪽으로 가까이 다가 왔다.

 나와 네로는 달리기 시작했다. 네로는 한 손으로는 우유 리어카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으깨진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온몸이 욱신거려서 더 이상 뛸 수가 없을 것만 같았지만 어쨌든 뛰어야 했다. 등 뒤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고 집요하게 울려오고 있었다.

 "네로야, 저기 경비업체 직원들이 쫓아오면 어떡하지?"

 나는 조금 떨면서 말했다.

 "아니야 못 쫓아와. 그리고 쫓아온다고 해도 상관없어."

 네로는 전혀 떨리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왜?"

 나는 네로를 바라보았다. 네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런 깡통 경비 따위가 대체 뭘 할 수 있겠어? 걱정 마. 저런 깡통 새끼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니까."

 "아무 것도?"

 "응. 아무 것도."

 나와 네로는 다시 뛰었다. 나는 이 좋은 밤, 파트라슈가 없는 것이 정말 유감이라고 네로에게 말했다. 네로는 웃으면서 나에게 뒤쪽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네로가 가리키는 곳에는 등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는 똥개 한 마리가 파트라슈를 대신해 우리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깡통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냐고, 그러면 대체 이 세상의 수많은 깡통들은 왜 그렇게 당당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고 있는 거냐고, 나는 되묻진 않기로 했다. 그저 나는 이것 하나만 알고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깡통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나와 네로는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하는 깡통 인간 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 말이다.

매일 새벽이 오면 여전히 나와 네로는 신문과 우유를 들고서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른다. 네로의 우유 리어카에는 우리가 얼마 전에 집에 데려온 똥개 파트라슈가 올라타 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네로는 이 똥개 파트라슈에게 리어카를 끌게 하기 위해서 목에 끈을 매어주고는, ‘달려, 파트라슈!’하고 신나게 소리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네로도 똥개 파트라슈는 리어카 위에 올라타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 같다. 똥개 파트라슈는 리어카 위에서 우유곽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을 핥으며 새벽바람을 쏘이고, 네로는 리어카를 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에 인라인 스케이트를 하나 장만하였다. 매일 새벽 나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서 아파트 사이를 가로지르며 신문을 배달한다. 그러다가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를 지날 때면 나는 으깨진 손을 열심히 흔들면서 깡통들에게 이렇게 아침인사를 건넨다.

 “안녕, 깡통. 오늘은 정말로 좋은 아침이야. 그렇지 않니?”

이 글을 쓴 이연실씨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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