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도 많은 이들이 동아시아로의 전환 혹은 회귀를 말하지만, 사실상 동아시아 담론이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90년대로 이미 10여년이 지났다. 90년대 들어 다양한 사상과 학문들이 너도 나도 비전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와중에 동아시아 담론은 어떻게 보면 그 어느 것보다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논의를 불러왔다.

동아시아의 경제 전망이나 동아시아 연대의 중요성에 대한 책이 쏟아져 나오며, 학계는 학계 나름대로 정ㆍ재계는 정ㆍ재계 나름대로 동아시아에 관심을 쏟는다. 도대체 동아시아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동아시아의 범주는 무엇이며, 우리는 과연 어떠한 점을 주시해야 하는 걸까.

사실상 현재 지구상에서 동아시아는 가장 빠른 속도로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냉전 체제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달라진 동아시아의 발전상은 충분히 세계의 눈길을 받을 만 했다. 동아시아 담론이 유행한 이후 가장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세계의 힘이 동쪽으로 옮겨진다’는 이른바 동진(東進)현상에 대한 것이었다.

문화나 경제의 흐름이 동쪽으로 오며, 이는 선진국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를 뒷받침할 만큼 동아시아는 빠르게 변했고, 오리엔탈리즘의 유행과 함께 동양적 사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말 힘은 옮겨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세계화의 틀을 넘지 않은 상황에서 패권에 대한 욕망이 내재된 성장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권과 구별되는 동아시아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결국적으로는 서구의 발전 논리와 개발 계획에 입각한 역풍에 불과한 것이다. 동양의 신비성을 강조하고 이질감을 증폭시키는 이른바 왜곡된 의미의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잘못된 동양예찬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하고 고민해야 할 동아시아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할 동아시아론은 복고주의, 신비주의로의 퇴행을 경계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적 역동성을 주목하고자 하는 일련의 지적흐름이다. 그것은 우선 동아시아의 인류학적 특수성이나 우수성을 찾아내려 하기보다 역사의 구체적 맥락을 복원하는 데 몰두한다’라고 문학평론가 고미숙씨는 말한다.

실제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소통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범주로 이용되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주변국의 운명으로써 복잡하게 얽힌 역사적 문제들을 먼저 풀어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역사적인 잘잘못을 가리고 논쟁을 부르기 위함이 아니라 상호연대를 위해 필요한 작업과 관심이다.

두 번째로는 경제적인 측면을 들 수 있겠는데, 동아시아의 경제가 서구경제체제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최근 몇 년간 동아시아의 경제블록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에 따라 다자간 협력기구에도 동아시아 각국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역차원에서의 협력 모색에 주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에 있어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의 발전이 단순히 경제적 이득을 얻고 서구권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경제활성방안을 통한 연대 방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국가들이 서구체계를 그대로 답습한 경제방식을 통해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새로운 경제시장을 위해 동아시아가 식민화 되었듯 같은 아시아 국가끼리도 자본주의의 악습을 되풀이 시키고 있다.

사실상 동아시아가 주목을 받게 된 것 역시 대부분 세계화의 공세 속에 신자유주의적 시각으로 봤을 때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서구의 일부 국가들이 만들어놓은 폐해를 답습할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연대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수없이 들어온 동아시아론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벗고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세계화 속의 또 다른 세계화를 만드는 국가집단이 아닌 전인류적 가치를 위한 공동체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