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를 녹여버린 올림픽 중계를 지켜보는 내내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세 가지의 목적에 충실했다. 그것은 ‘적’의 공격력을 격멸시키는 것, ‘적’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밟고 올라서는 것 그리고 마침내는 ‘적’의 경기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더욱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서 전달되는 빛의 속도를 따라서 유니폼을 입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 되거나 병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금메달을 거머쥐고 가장 높은 고지에서 깃발을 꽂는 그 순간에 그 영웅을 칭송하는 조각조각의 몽타주는 삶을 가장하고 있지만, 마침내는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하여 전장에서 치러지는 장례식과도 흡사하다.

집단적인 광기와 살인의 타나투스적 전쟁 욕망을 배설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올림픽이라는 축제가 자리잡았다고 한다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비단 올림픽에만 반영되어 있진 않다. 도시의 성장과 인간사회의 진화를 전쟁모델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폴 비릴리오는 인간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을 전쟁수행능력에서 찾고 있다. 즉 공간과 시간을 초월적으로 지배하는 질주의 논리와 더불어 배가된 전쟁능력은 무한한 전쟁수행에 적합한 형태로 현대 사회를 변형시켜왔다는 것이다.

여전히 세계의 한쪽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산복합체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도시를 창조해온 것이 역설적이게도 전쟁이라면 정치의 최고의 형태가 바로 전쟁이라는 클라우제비치의 열변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릴리오의 논의는 더욱 심화되어 도시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기에 적당한 형태로 영토화되어 왔는지를 폭로하는 것과 더불어 시각적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전쟁 테크놀로지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온 과정을 고고학적으로 파헤친다. 적군을 향해서 돌진하거나 인간의 가시적 눈에 보이는 적을 겨누고 발사하는 육탄전의 형상은 더 이상 승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어둠까지도 투명하게 만드는 조명무기, 카메라가 달린 핵폭탄, 적군의 영토를 빈틈없이 정찰하는 정보 위성과 같은 시각의 병참술이, 물질적인 무기의 과시가 아닌 고도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각 기계의 파노라마적 편재성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절대적 무기가 된다. 마침내 시각적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함열되어 버린 시공간은 ‘정보’를 가장 공포스러운 무기로 발명해 낸 것이다.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 되어 버린 오늘날 실제적 여행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다. 전장을 사실보다 더욱 실감나게 재현한 영화에서, 적을 무찌르고 고지를 점령하는 스포츠에서 전쟁은 끊임없이 대체되어 반복된다.

스크린은 영상과 음향 기술로 무장한 전쟁의 지각적 병참기지가 되어 왔다. 인간은 정지해 있으나 모든 시각적 대체물은 실재보다 더욱 빠르게 움직이며 전쟁을 수행중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장에서 승리자는 누구인가.

이 글을 쓴 이희랑씨는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박사 3차)을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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