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가 있다. 숫자가 적기 때문에 마이너리티가 아니며, 수준이 낮아서 마이너리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치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잇는 사람들. 다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면의 새로움과 소중함을 알고 있는 진정한 마이너리티,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편집자주>

길거리에서 전태일을 만났다. 웨이터였다. 난 놀랄까 하다가 그냥 명함을 받고 씨익 웃어 주었다. 유난히 그런 동네에 내가 와 있는 건지 아니면 온 나라가 천박해 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태일 웨이터를 뒤로하고 몇 걸음 걷자 ‘IMF’라는 단란주점도 눈에 들어온다. 화를 낼 수도 없다. 이 정도면 그냥 ‘우리 민족은 정말로 한을 승화하는 능력이 탁월하구나’ 하고 생각해야한다.

유행은 참 가지가지다. 군부독재의 똘마니들이 붉은악마처럼 광화문에 모여 데모를 하질 않나 유신독재의 원흉을 카리스마 있다고 하질 않나, 하긴 장세동이 대통령이 되어야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택시기사도 직접 겪어봤으니 누가 뭘 어쩐다고 뭐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전태일 웨이터나 IMF 단란주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기로 하자. 다 유행이니까.

이쯤에서 내가 왜 유행타령을 주절주절 늘어놓는지 말해야할 것 같다.

소수자, 마이너리티, 이 단어도 요즘 유행이다. 아니 유행이 된지 벌써 제법 된 것 같다.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소수자란 개념이 우리사회에는 어떻게 합의되었는지 난 아직 잘 모른다. 그래서 지금부터 난 내가 알고 있는 소수자와 내가 반대하는 소수자를 말해보겠다.

"우리나라 노숙인의 대부분은 출발자체가 생계형 노숙인"

사회적 약자, 숫자와 관계가 없는, 그렇다. 이건 숫자와 관계가 없어야 한다. 상식의 범주에서 소외된 모든 것을 소수자라고 해야 한다. 권력의 범주란 말을 쓰고 싶지만 권력의 놀라운 변신술 때문에 난 권력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다. 탄핵에 찬성한 소수와 권력을 내놓은 마이너리티를 생각하면 나의 분류법에 동의 할 것이다. 이렇듯 합의 되지 않은 소수자와 마이너리티는 많은 함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잠깐 내가 권력과 바꾸어서 쓰기로 한 상식이란 말을 생각해보자.

우리사회에는 여러 가지 상식이 공존한다. 사실이다. 우리의 사회의 상식은 아주 주관적이고 시대 혼합적이어서 진정한 상식을 상식으로 유통시키는 것에 많은 장애가 있다. 국보법 사태만 해도 그렇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도 그렇다.

두 가지 아니 열 가지 만 가지 상식이 공존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사회다. 소수자도 그렇다. 장애인도 동성애자도 소수자이지만 극우도 극좌도 소수자이다. 이쯤 되면 혼란스러워진다. 아니 현재 우리나라의 소수자라는 개념이 그렇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제안한다. 이쯤에서 우리(?) 유행처럼 떠들어대는 소수자와 마이너에 대한 합의 또는 상식적 개념을 위해 좀 더 근본적인 논의를 할 것을 말이다.이것이 내가 말할수 있는 소수자와 마이너리티에 대한 전부인 것 같다.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한 일을 말해야 할 것 같다.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 아니, 현대 미술의 대명사로 불리워진다해도 무방한 공공미술이란 말이 요즘 미술계에서 유행이다.

일탈과 반항과 자유로서의 노숙과는 거리가 멀다

이 안에도 조금 들어가보면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들이 합의되지 않은 채 공룡처럼 커져 이미 활보하는 개념이 있다. 공공성 바로그것이다. 앞서 말한것처럼 그 많은 상식, 도저히 공존할수 없는 정도의 반대개념이 서로 상식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는 우리사회에 공공이란 단어는 과연 가능할까?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극히 주관적인 향유의 감정이 이입되는 미술이란 개념과 함께 들어 있는 공공이란 정말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 할 것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선행되어져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바보 같은 말같겠지만 배려와 진정성이다.

무엇을 위하여란 말은 위험하다. 조금만 타인을 배려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면 된다.  소수자건 마이너리티건 말이다.

그 다음의 방식은 가장 자유롭고 즐거운 것을 찾으면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하고자하는 혹은 공유하고자하는 생각들이 유행이 아닌 진정한 상식으로
우리 옆에서 길게 살아갈 것이다.

참, 마이너리티에 대한 말을 못했다. 현재 내 생각은 이렇다.

태도, 우리가 요즘 마이너에 대해 이렇듯 열광하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태도 때문이지 않을까? 위치 또는 지향과 관계없이 인간이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상황에서 표출해내는 아주 순도 높은 순순한 정열의 다른 이름이어서 마이너리티여서 요즘우리는 마이너리티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닌가?

이 글을 쓴 배영환씨는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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