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수능 시험을 치르던 바로 그날, 프랑스에서는
많은 고교생들이 밤늦게까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같은 또래의 친구
들이 기성 작가들을 불러다 놓고 문학 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해
서였다. 그 전날인 12일 파리에서 일백년 가까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프
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의 수상작품이 발표됐다. 공쿠르 아카데미가
심사한 결과를 공개하는 시간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 지방 도시 렌에서도 `고
교생'들이 심사하고 시상하는 공쿠르상을 발표했다. 올해로 구년째인 이 `고
교생 공쿠르상'은 프랑스 문하부와 교육부 등이 후원하고 프랑스 제1의 멀티
미디어 유통업체인 FNAC가 행사를 주관한다.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9월 중순
전국 13개 도시에서 뽑힌 고교생 심사위원 13명은 그 무렵 어른들의 `공쿠르
아카데미'가 뽑은 수상 후보자 10개 작품을 어른들과 똑같이 읽기 시작한다.
88년, 89년, 91년, 95년 등 네차례나 어른 공쿠르나 고교생 공쿠르의 수상
자가 맞아 떨어졌다. 언론들도 어른 공쿠르상 못지않게 고교생 공쿠르에 관
심을 보이면서 권위와 미래지향적 안목을 인정해 준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요즘처럼 어수선한 정국과 경제불황에 넌덜머리를
치는 국민들은 답답한 마음을 다독거려줄 그 무엇을 바라고 있다. 갑갑할 때
TV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대부분의 우리네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공중파
TV채널들은 국민들의 이런 기대에 등을 돌린다. 방송시간의 절반 이상을 오락
으로 채운다. 전에는 그래도 공영방송의 공익성에 다가가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온통 상업방송이 판을 잡았다.

97년 춘계 TV프로그램의 정기개편을 분석한 결과에 기대어 보면, KBS1을
제외한 3개 방송이 오락 전문채널로 바뀌었다. 특히 황금시청 시간대에서
오락이 차지하는 편성비율이 KBS2 73.8%, MBC 67%, SBS 73.8%로 나타났다.
계층이나 다양성의 원칙을 저버린 채, 10대와 주부들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기형적으로 짜는 실정이다. 종합편성이나 채널특성화는 아예 구두선에 그칠 뿐
이다. 특히 드라마와 코미디가 차지하는 비율이 KBS2 39.3%, MBC 55.1%,
SBS 62.6%로 나타났다.

특히 방송 프로그램이 드라마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엄청난 제작비도 문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대부분 드라마가 불륜, 호화, 음란, 폭력, 남자죽이기
등 갖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방송3사가 일일.주중.주말
.단막.특집 등 갖가지 형식으로 내놓는 드라마는 한주일에 무려 30~40편에
이른다. 그것도 부족해 주말 오후에 온통 연속극을 재방송하는 것으로 메꾸
고 있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정서를 해치는 공해식품과 다를 게 없다. 국
민들은 채널 선택권을 송두리채 빼았긴 채 방송사들의 시청률 경쟁에 볼모가
되었다.오락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TV에서 오락이 갖는 기능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른시간부터 깊은 밤까지 드라마, 코미디, 토크쇼, 스포츠 중계 등
으로 줄곧 채워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하루 빨리 10대 쇼는 케이블 전문채
널로 옮겨야 하고, 드라마와 코미디의 편수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이스라
엘과 독일에는 연속 방송극이 아예 없다. 우리처럼 매일같이 폭력을 미화하
고 저질과 불륜물을 쏟아 붓는 나라는 없다. TV의 프로그램이 계속 이런 상
태로 간다면 `TV 안보기 운동'을 시민운동 차원에서 벌여야 하고 광고상품을
불매하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 더이상 청소년을 병들게 해서는 안된다. 미래
의 비전을 주는 건강한 TV로 방향을 틀 때다

박영근 <문과대 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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