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하기(baring the device)수법이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의 글
에도 나타난다. 그는 1인 저널리즘 ‘인물과 사상’ 시리즈로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주거래 출판사인 개마고원에서 독립, ‘월간 인물과 사상’을 따로
출판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강교수 글이 이토록 ‘호황’을 누리는 것은 그의 전작 ‘김대중 죽이기’에
서도 보여지듯이 무엇보다 다이나믹하고 공격적인 문체 덕분이라는 것이 일반
독자들의 평가다.

그의 문체가 독특한 매력을 가지게 하는 주요한 동력인 공격성은 ‘자기자신
의 타자화’를 통해 유지된다. 그를 게릴라 전사로 만드는 1인 저널리즘이란
맥락에서 그는 공격적 문체를 고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특정한 매커니즘에 소속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저항적 정체성과 정치적 감수
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강교수는 자신의 사상과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어떠한 매커니즘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할 것으로 보인다.

저항성으로 배태된 어떤 조직체계도 결국에는 새로운 권위를 누리는 권력집
단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강교수의 이러한 견제의식은 인물과 사상 시리즈 4권에 있는 ‘창작과 비평이
란 정부를 세운 백낙청’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같은 식구는 키워 주고 식구
가 아닌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식의 비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비판이 있지만, 감히 그 누구도 그걸 공개적으로 발설하지는 않는다.”

그는 백낙청이 세운 ‘창작과 비평’이란 정부에 특유의 칼날을 들이댄다.

당파성이라는 매커니즘의 속성상 비평가가 생각한 현실의 어떤 모델을 전체적
으로 따르도록 강제하는 환원주의적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강준만 교수에게는 이러한 의식하에 자기자신을 특정 매커니즘으로부터
타자화시킴으로써 공격성이라는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를 누리고
있다는 비평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쓰기가 새로운 파쇼를 잉태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대부분의 독자가 그의 공격적 문체로 환기의 기쁨을 누리는가 하면,
이면에서는 그의 공격을 새로운 ‘프로레탈리아 독재’의 형태로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월간 인물과 사상 창간 준비호에 강교수보다 훨씬 원색적인 문체
를 쓰는 ‘고향이 소위 TK인 범인’이 투고한 ‘강준만의 강의를 들을 전북대
학생들이 불쌍하다’는 글에서 보여진다.

TK진영의 비판에 대해 김대중 지지자인 강준만 교수는 단순한 반대측의 감정
적인 반응 정도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문화권력’을 얻고 싶다고 자인하듯
새로운 권력을 가지게 된 강교수는 공격적 문체로 또다른 폭행을 가하고 있
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식인이 전사(戰士, artisan)란 점에서 강준만 교수는 면죄
부를 받을 법도 하다. 좌파지식인이 아님을 명확히 한 바 있는 이에게 이러한
명제가 얼마나 소용이 있을지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지성계라는 이념전선에
투입된 게릴라 전사는 승인투쟁(recognition struggle)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존립의 당위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자신은 백낙청 교수와는 달리 ‘늘 감시받고
비판에 열려 있겠다’고 공약한 사실 때문이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자를 편안케 하지 않고 흔들어 놀라게
함으로써 독자와 자신을 소비적 양태와 친권력적 의도로부터 해방시켰다.

다만 강준만 교수에게 우려되는 것은 맑스주의마저 상업화시키는 자본주의
라는 거대한 힘 앞에 ‘독자를 흔들어 놀라게 하는 것’마저 상업주의로부터
얼만큼 독립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언론에서 이르는 바대로
‘강준만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식인이나 언론인을 환골탈태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인 만큼,
강교수의 답변이 궁금하다.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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