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게 첫눈이 내린 겨울. 나는 후배와 함께 대학로의 동숭아트센터 지하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시아영화제 주간이었고, 구석구석에 붙은 영화 포스터들이 첫눈의 설레임처럼 상상을 자극했다. 주중이지만 유현목의 '오발탄'에 거는 기대가 큰지라 한걸음에 달려온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 지났을까. 대학 1학년생 정도의 한 여학생이 표적물을 만나 듯 성큼 와서는 대화를 깬다. "혹시 표 있으세요?" "네…(내가 뭘 잘못했나?)." "그 표 저 좀 주실래요? 학교에서 리포트 냈는데, 이 영화는 보고싶지 않고, 봤다는 증거물은 제시해야 하거든요." "네… 여기 있어요, 하지만 보고 가시지요." "재미가 없을 거 같아서요." "…."

표를 건네긴 했지만, 그 순가 드는 생각은 '저 학생은 어떤 리포트를 써서 낼까?'하는 것이었다. 그 학생이 자족한 건 적어도 '아시아 영화제' 상영 분위기와 학교의 경계를 넘어 문화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 하나. 그러고 보면, 경계란 건 단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단지 뛰어넘었다는 이유만으로 당당할 수 있는 허위. 그 결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안과 밖의 확연한 경계인 집 문턱을 나서도 반복되는 건 건조한 일상이다.

그러나 이 일상의 경계를 오갈 때는 거짓말이 빈번히 등장한다. 표를 얻어간 학생이 리포트에서 영화를 본 것인 양 하는 거짓말, 늦은 귀가 시간에 대해 가족에게 건네는 변명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더한 거짓말은 이 경계가 커질 때 발생한다. 지난 11월 14일자 국민일보의 '거짓말' 보도를 보자. 그 보도의 요지는 나우누리 통신망 동호회방인 '찬우물' 투쟁 속보란에서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이 컴퓨터 통신망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반미반정부 투쟁에 나설 것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내막을 알아보니, 한 고등학생이 프랑스 고교생들의 시위를 TV에서 우연히 보고 '프랑스 고교생 투쟁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토론장을 개설한 것이다. 그 학생의 입장은 프랑스 고등학생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에 대한 시위가 놀라웠고, 우리 교육환경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도상에서는 사건주체가 고등학생이 아닌 한총련으로, 선의의 토론 목적조차 '이적단체'의 불온한 행위로 탈바꿈한 것이다.

경계가 낳은 거짓말이다. 사이버 공간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 이 경계선에는 무수히 '반불온을 가장한 불온들'이 존재한다. 공안 이데올로기, 상업적 안보주의, 토론 기피증 등 한층 세련되게 변신한 불온들. 물론 사이버 공간만은 아니다. 사회 도처에 만들어 놓은 문턱, 그 경계 속에는 언제나 배타적인 적대가 존재한다.

물론 적대는 인정할 때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무턱대고 덮어두는 거짓 화해는 언제나 또 다른 적대의 불씨를 남겨두니까. 문제는 '우리'와 '그들' 의 경계를 긋기 위해 동원되는 거짓말, 그 불온함에 있다. 어이없이 선의의 의지들을 꺾고 일상에 자족하며 살게 하는 그 거짓말, 적대시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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