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배신으로 인해 그 남자 사이에서 난 아이마저 죽인 여자, 바로 메디아이다.
고대 그리스 에우리피데스 원작의 '메디아'는 이렇게 순수성과 원시성이 공존하는 원형적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때 당시 이 연극은 기존의 신 중심의 내용과는 달리 인간적 요소를 강하게 나타내어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연극학과에서는 초연으로 발표되는 작품이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극의 현대적 재구성, 스튜디오 공연이라는 거리 좁히기 시도 등으로 학생들간에 큰 호응이 있었다.

낡고 녹슨 철문과 그 앞에 쌓여진 모래,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무대장치로 연기자들의 연기가 더욱 강조되었던 메디아. 그녀의 절규를 들어보자.

"당신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내가 아니었나요. 나는 아버지와 고국을 배신하고 당신을 도왔어요. 당신이 도망칠 때 난 내 남동생을 토막내어 병사들을 막기도 했다구요."

그녀는 권력과 명예만이 전부인 남편, 이아손을 사랑하지만 너무나도 현실적인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내동댕이친다. 낮고,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그녀의 울음소리와 눈물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냉담하기만 한 이아손, 그는 왕의 딸과 몰래 결혼을 하고 메디아는 분노에 떨게 된다. 결국 그녀가 택한 것은 그의 파멸이었다. 왕과 공주를 속임수로 죽이는 것까지 모자라 이아손에게 아이들의 시체를 보이는 장면에서 그는 무릎을 꿇게 된다. 메디아의 짙은 보라색 의상과 파르르 떠는 손에 묻혀진 붉은 피는 색채의 강렬한 조화와 함께 그녀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토록 잔인한 증오의 모습은 사랑의 또다른 이름인 것이다.

죽은 아이를 끌고 사라지는 메디아, 원작에서 그녀는 헤카테 여신의 사제답게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지만 그런 신화적인 요소는 최대한 삭제, 변형되어 올려지는 극이었으므로 이아손의 신음소리와 함께 막이 내린다. 한참이나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어둠속에서 메디아는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뇌리에 박혀 왔다.

"이아손과 메디아를 통해 현실적인 사랑과 융합되지 못하는 절대적인,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사랑과 증오야말로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연출을 맡은 최치림 교수(예술대 연극학과)의 말이다.

코러스를 통해 객관적인 설명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끌고 나갔던 이 극에서는 단연 메디아의 연기가 돋보였다.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복수에의 의지를 불태우다가도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주저하는 모습이라든지, 극한 절망의 상황에서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던 한 줄기 눈물은 진한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고전희곡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느냐, 그것이 가장 큰 관건인 것이다. 기원전 431년이라는 신화공존의 사회배경과 메디아를 이루고 있는 주술적 성격, 희랍비극의 특성인 코러스를 형상화하는 데 주력했다는 '메디아'는 그런 현대화에 있어서 우선 성공을 거두었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촉박한 연습시간과 부족한 지원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직접 발로 뛰며 기획을 하던 학생들의 모습들로 인해 중앙대 연극학과의 비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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