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돌아본다는 말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요즈음 학생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더 더욱 자주 하게 됩니다. 요즈음 캠퍼스에서 만나는 많은 학생들이 하나같이 백팩을 매고, 핸드폰을 손에 쥐고 걸어갑니다. 때론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는 여학생이나 각종 유명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는 남학생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토플책을 옆에 끼고 도서관을 향하는 학생들도 쉽게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밤늦게까지 북을 두드리며 다른 학생들에게 주는 피해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학생들도 매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한국 대학생들은 어지러울 정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지성인의 모습보다는 소비사회의 주체로서 혹은 대중문화의 수용자로서의 모습들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80년대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했던 대학생들의 모습과는 달리 90년대의 대학생의 모습들은 사실 너무 다양합니다. 예비 지식인, 대중문화 소비자, 취업 대기자, 유한계급 등 다양한 모습을 요즘 학생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과거의 대학생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대부분이 70년대 후반에 태어나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에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가족구조가 바뀌면서 전통적인 확대가족이 줄어들고 핵가족이 확산되었습니다. 핵가족의 경험과 상대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그 전의 대학생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개인주의적으로 변했고, 서구적인 가치관에 더 노출되어 있으며 더 소비 지향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상업화된 대중문화의 위력입니다. TV와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쏟아지는 각종 대중 문화 산물들이 대학에 그대로 들어와 대학문화의 독자성을 빼앗아 갔습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대학생들 스스로가 매스미디어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고, 대학인이 이러한 대중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성찰하고 대중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조직적인 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은 고등학교 학생들과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즉 과거의 대학생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고등학교 학생들과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는 동질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대학생들이 상업화된 대중문화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즐겨 듣는 음악이나 많이 보는 만화나 오락 등에서 그리고 복장과 대화에서 이제 대학생들과 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만큼 대학생들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 대학생은 대학에 입학하면 마치 지성인으로서 통과의례를 마친 것처럼 의식적으로 고등학교 학생과의 차이를 강조하기도 했지요.

대학생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은 대학인 사회변화를 선도하지 못하고 사회변화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산물입니다. 상업화된 대중문화를 극복하는 대안문화로서 대학문화가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 정체성의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대학의 위기를 가져오는 주된 요인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것처럼, 대학생 수가 증가하고, 대학이 많이 설립되면서 대학 졸업자들의 취업이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 졌습니다. 더구나 1997년 말부터 시작된 IMF외환위기로 인한 경제 침체로 대학 졸업자들의 취업 기회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IMF로 인하여 취업난이 더욱 심해지면서 요즈음 대학생들의 주된 관심사는 오직 취업입니다. 일부 학생들의 경우 대학 입학에서부터 졸업 때까지 취업을 위한 준비로 나날을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의 도서관이 고시준비를 하는 학생들로 채워지고, 취업준비 때문에 도서관 자리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9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경우 대학의 전공과 무관하게 취직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대학에서 이루어 지는 전공강의가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취업과 직결되는 강의가 아닌 경우 수강생도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순수학문이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의 결여로 집약되는 이러한 현상은 90년대에 들어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의 전공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취업준비로 대학은 한낱 졸업장을 주는 기관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한 사회의 최고 지성을 배출하는 기관이 아니라 평생 가지고 다니는 학벌 증명서를 주는 기관이 된 것입니다. 대학이 취업준비 기관으로 기능하는 한, 대학은 사회변화를 주도하지 못하고 사회변화에 적응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대학의 위기는 더욱 극복되기 힘듭니다.

대학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대학 조직뿐만 아니라 교과과정상의 변화도 커서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교과과정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전문대학이 대학으로 승격되고 많은 전문대학들이 정보관련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종합대학을 비롯한 전체 대학수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대학 정보화로 인하여 이제 모든 대학에서 컴퓨터 실습실과 미디어 센터가 만들어져 10년 전 대학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여러분들의 정체성형성에 관한 문제는 대학이나 학생들에 의해서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자기 정체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대학생활은 혼란스럽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대학생들의 자기 인식과 역사 인식도 변화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변화의 와중에서도 시대적으로 대학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독자적인 역할과 비중이 항상 있어 왔다는 점입니다. 기존사회를 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이 비판적인 대학인들에 의해서 공급되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창조적인 사회를 통하여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이념과 지식이 대학에서 만들어졌고, 대학생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지적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대학이 단순히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라 한 사회를 움직이는 지적 담론과 지적 생산의 공간이라는 점은 바로 이러한 역할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과거와 같이 대학생이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소수의 집단은 더 이상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집단과의 차이는 강조되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생은 어떤 집단일까? 대학생만이 할 수 있는 시대적 역할은 무엇인가? 대학은 나에게 무스,S 의미를 갖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대학생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토론 될 때, 비로소 대학생들의 정체성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정체성은 다른 집단과의 차별화를 통해서 형성됩니다.
또한 교수의 숫자가 급증하고 대학원이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학부는 과정으로만 인식되는 경향도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비해서 학부 학생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의 대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정체성은 기성에 물들지 않은 젊음과 패기이며 지적인 도전성입니다. 대중문화에 찌든 대학생에게 이러한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제자 여러분, 이제 젊은 여러분들이 대학생으로서 정체성을 다시 확고하게 확인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패기에 찬 활동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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