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사 여론생활부에서는 개교80주년을 맞아 교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인물들을 찾아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주>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개천절 즈음해서 흥얼거리는 앞의 노랫말과 같이 물이건, 나무건, 심지어 사람이건 간에 그 근원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뿌리를 앎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됨과 더불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사 80주년을 넘어선 지금, 의혈의 뿌리를 고 승당 임영신 박사에게서 찾음에 의문을 가질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1899년 전라북도(현 충청남도)금산에서 태어난 임영신 박사는 1933년 중앙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기까지 국내 및 미국, 일본에서 민족독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을 함께 벌였다. '승당 임영신의 애국운동연구'(동방도서 펴냄)를 살펴보면, 임영신 박사는 전주기전여학교 학생시절 스승이었던 경재 김인전 선생을 통해 신앙과 민족정신에 스승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례로 재학중 '여장사' 혹은 '또순이'등으로 불렸던 임박사는 천황사진을 부수기도 하고, 3 . 1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을 당하기도 한다.

임영신 박사는 옥고를 치른후, 조국의 독립은 '교육입국'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미국에서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조우한다. 이 과정에서 신념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미친 여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황량한 오지에 학교를 설립해 '흑석동의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창학 이후에도 임영신 박사는 학생들을 '나의 아들, 딸'로 부르며 제자사랑을 몸소 실천하려 애썼다. 조동호 생활관장(법정대 정외과 66년졸)의 회상에 따르면, 4 . 19 당시 학생들이 교문을 뚫고 한강대교로 진출하려 하자 "아들딸들이 다치는 걸 차마 내 눈으로 볼 수 없다. 차라리 나를 밝고 나가려"며 교문 앞에서 버티는 임영신 박사를 학생들이 머리위로 들어올려 수위실로 옮겼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극히 어려웠던 당시에 임박사는 의혈의 어머니인 동시에 또한 여자국민당의 창당(당수), 초대 상공장관, 민의원위원, 유엔한국대표, 제헌동지회장에 이르기까지 여성운동가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의와 참에 살다간 여장부 임영신 박사.

"흔들리지 않는, 조국 사랑하는 철학/당신의 생애.../이것으로 이루어진 영원 불멸한/겨레의 별/아름다운 승리의 그 하늘이옵니다"라는 조병화 시인의 임영신 박사에게 바친 추모시가 결코 과장되게 들리지 않음은 건학 80년이 되도록 꿋꿋이 버티는 의혈교정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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