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유연적 축적 전략이 고용불안을 불러오게 되면서 실생활에 실질적 기술과 지식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인문학이 홀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현실은 아니어서 영국의 경우 이미 70∼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문학 위기에 대한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처리즘이 표방한 시장경제 지상주의로 인해 취업이 잘되는 이공계쪽으로는 학생들이 몰리는 반면, 순수 학문 지원자는 대폭 감소해 고전문학, 철학, 역사학 등의 인기가 급하락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심화에 한술 더 떠 날로 위력을 더해가는 정보화는 '케케묵은'학문으로 낙인찍힌 인문학의 존재 자체를 더욱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에 있어 미래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지난 28일, 인문과학연구소(소장 : 현중식, 문과대 영어영문학과) 주관으로 열린 14개 대학인문학연구소 학술심포지엄 '현대 사회의 인문학 위기와 전망'에서는 이러한 인문학 위기에 대한 총체적 진간과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져 관심을 모았다.

특히 강내희 교수(중앙대 영어영문학과)와 심광현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는 위기에 몰린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문화적인 관점과 접목시켜 논의를 펼침으로써 새로운 방향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심광현 교수는 인문학의 발전방향을 전망하면서 지식생산과정과 주체화 양식의 변화 그리고 복합문화의 가속화란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 나가고 있다. 그는 이러한 변화들이 지구방화와 정보화의 가속화로 초래된 테크노, 사이버 문화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심교수는 "지구방화란 국경을 초월한 자본운동의 가속화와 이에 수반되는 무한경쟁의 지구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면에서 생산성 제고를 위한 치열한 노력이 진행되고 이는 정보화 과정을 통해 더욱 가속화 된다"며 이러한 경향이 테크노 문화를 불러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테크노 문화 속에서 지식은 앤소니 기든스가 말한 '자기 성찰적 과정의 강화'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시 말하자면 지식 그 자체의 생산양식을 객관화함으로써 지식은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내부의 지식생산자체를 대상으로 삼게 된다는 설명이다. 또한 그는 매스미디어를 통한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가속화되는 복합문화를 필연적으로 수용하되 미국문화 헤게모니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의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인문학에 주어진 과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경향들을 인문학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테크노 문화의 가속화 경향 속에 내재하고 있는 지식생산양식과 주체양식의 변화, 복합문화의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문화적, 교육적 프로그램을 인문학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심교수가 주장하는 바이다.


이에 강내희 교수는 문화연구와 문화공학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면서 인문학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대처리즘이 표방하는 신자유주의가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오게 되자 이에 대항해 진보적 인문학자와 사회학자들이 '문화연구'라는 새로운 학문하기를 시도했다. 문화연구라는 것은 문학, 어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을 망라한 통합학문으로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이나 소수인종과 같은 하위문화와 영상매체나 대중매체 같은 새로운 문화지형들을 자신들의 연구영역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강교수는 "문화연구가 인문학을 사회이론과 접맥시키려는 노력이고, 또 인문학이 그 동안 외면해온 사회적 쟁점들을 전면화 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라면, 문화공학은 인문학을 자연과학이나 공학 혹은 과학기술과 절합시켜 실물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생산적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근대적 학문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인문학에 주어진 과제요 그 전화의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문학이 자기변혁에 전념하기는커녕 이데올로기나 기율권력으로서의 자신의 성격을 고수한 결과 인문학 위기가 초래됐다고 보는 강교수는 인문학의 진원지는 바로 인문학 내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강내희 교수는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나비효과를 끌어들이면서 논의들을 정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문학의 변혁은 사회를 위해서, 사회를 향하여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를 대변한다는 의식을 굳이 갖지 않더라도 인문학 내부의 새로운 실천이 파장을 일으키고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방식을 바꾸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와 인문학을 접합시키려는 이러한 노력들이 추상적 논의에 그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접합 가능성 자체에 부정적인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논쟁과 대안의 모색이 이루어지는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들이 구체성을 잃어버린 채 제도적 성과와 연결될 수 없다면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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