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기까지 셈하기도 어려운 해들을 지나 보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껴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닌 건 맞지만, 나의 마음이 유독 그 사람에게 인색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서로를 향한 마음의 크기가 같을 수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그러나 이도 그저 가정의 문법으로 작게 읊조릴 뿐이다. 

  사랑의 많고 많은 본질 중 하나가 ‘불평등’이란 사실을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깨달았다. 더 사랑하는 쪽이 아플 수밖에 없다는 모순은 깨달음의 덤이었다. 지나온 시간을 반추해 봤다. 나는 그이의 사랑을 언제나 관망하는 쪽이었더라. 알면서도 모른척한 날들이 더 많았다.  

  3월 13일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약소한 축하의 메시지 뒤에 사랑한다는 말을 어렵사리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아득했다. 인생을 얼마나 살아봤다고, 사랑의 무게를 얼만큼이나 안다고 그리 오랜 시간을 망설였을까. 아마도 엄마는 사랑이라는 말랑한 한 단어 따위에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엄마는 강한 사람이다. 엄마가 일찍 곁을 떠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기 전까지 나는 엄마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다. 부모라는 존재가 가장 필요한 사춘기의 나이에, 엄마는 자신의 엄마가 되었다. 어쩌면 기쁨에도 슬픔에도 담담할 수 있는 엄마의 강함은, 살아가기 위해서 여리고 여린 마음에 굳은살을 심어내야 했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요즘 엄마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점점 엄마의 감성은 소녀를 닮아간다. 남겨진 사진 한 장이 없어 구술로만 전해 들었던 엄마의 천진난만한 시절이 꼭 지금의 기운과 같았을까. 생일날 표현한 사랑한단 말 한마디에, 기세에 힘입어 던진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로 엄마의 목소리엔 화색이 돈다. 들뜬 그녀의 목소리는 나의 이기적이었던 사랑법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잊었다는 것은, 한없이 여렸고 앞으로도 여릴 엄마의 일부를 잊었다는 말과 같다. 엄마의 유약함을 처음 들었던 날 가끔은 엄마의 엄마가 되어야겠다는 나의 다짐을 잊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종이 냄새보다는 꽃향기를 더 좋아하는 엄마이기에, 이 꽃피는 봄날에 그녀의 손에 신문이 들려 있을 진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 당신이 지금 이 부끄러운 글을 읽어 내려가는 중이라면 편지지만큼도 못한 지면 한구석을 빌려 고백한다.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서 헤매는 당신의 생이 한없이 작게 느껴질지 몰라도, 당신의 존재는 곧 나의 우주였음을.  당신의 강인함부터 유약함, 나는 그 전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또다시 사랑을 말해도 부족할 만큼. 

 

 

 

 

 

 

김지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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