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신지윤 기자
이미지 신지윤 기자

 

일상다반사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는 뜻으로, 보통 있는 예사로운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기획 ‘일상, 다 반사’는 우리가 ‘일상’에서 가볍게 지나치는 대상 혹은 현상을 ‘다 반사’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을 지향합니다. 이번에 다뤄볼 주제는 인문사회 학술번역입니다. 단지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낯선 문자와 씨름했던 경험, 없으신가요? 연구자들은 학술번역의 부족이 인문사회의 저변을 축소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세종대왕의 높은 뜻이 녹슬지 않을 방법을 사회부가 궁리해봤습니다.

신지윤 기자 neoyoon@cauon.net

“번역은 보통 뼈를 깎는 작업이라고 하는데요. 원문 텍스트의 흐름과 의미를 충실하게 옮기고 다른 텍스트와의 상호관계성도 살펴야 합니다. 번역을 하는 것은 연구논문을 쓰는 것보다 공이 더 많이 들고, 시간도 훨씬 많이 든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꽤 있습니다.”  
-최윤영 교수(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이 없길 바랐던 세종대왕의 염원은 과연 이뤄졌을까. 학문의 뜻을 펼치는 일에 한글의 쓰임은 아직 제자리걸음이다. 한국 인문사회 학술번역이 처한 현실과 풀어야 할 숙제를 짚어봤다. 

 고충도 번역이 되나요 
  근대 정치학의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는 『군주론』(마키아벨리 씀)의 국역본은 1958년 처음으로 출판된 후 현재 수십 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생애 마지막 저서이자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역작이란 평가를 받는 『피렌체사』(마키아벨리 씀)는 2022년 12월 처음으로 국역본이 출판됐다. 이는 국내 인문사회 영역에서의 학술번역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임을 드러낸다.  

  실제로 인문사회 학술번역은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다. 이영훈 교수(고려대 불어불문학과)는 “인문사회 학술번역 부족 문제는 항상 겪었던 일”이라며 “연구를 하다 보면 모르는 언어로 된 해외 학술자료를 참고해야 하는 상황이 빈번히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은 “갈수록 대학 사회에서 차지하는 인문학의 비중이 좁아지면서 국내 인문사회 학술번역의 공급도 매우 부족해진 상황”이라고 밝혔다. 

  번역의 질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지고 있다. 진태원 교수(성공회대 민주자료관)는 “철학의 경우 개념이나 용어를 원래 취지에 맞게 번역하지 않으면 오독될 여지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어 “비전공자인 번역가가 번역할 경우 용어나 개념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덧붙였다. 정은귀 교수(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또한 “번역을 위해서는 모국어와 다른 언어를 평평하게 갈아입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면밀하게 읽고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어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학부생에게 번역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기자는 <온라인저널리즘론>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은 미디어가 강조하는 사안에 근거한다는 ‘점화효과이론’에 대해 배웠다. 교수자는 그 예시로 걸프전쟁 당시 미디어 보도의 중점사항 변화와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 변화 간 상관관계를 다룬 논문 「Priming and Media Im–pact on the Evaluations of the President’s Performance」(ZHONG–DANG PAN 외 1명, 1997)을 소개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은 기자는 이 논문의 번역본을 읽고자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원문을 구했으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과연 이런 일은 기자에게만 발생한 걸까.  

  학부생들은 저마다의 고충을 늘어놨다. 박상민 학생(숭실대 일어일문학과)은 “일본어에서 ‘살다’라는 뜻의 단어는 ‘住む’, ‘生きる’, ‘暮らす’ 로 총 3가지”라며 “세 단어의 미묘한 뜻 차이를 의역해 주지 않아 직접 찾아봐야 했다”고 토로했다. 또한 수업 과정에서 번역서가 아예 부재한 경우도 있었다. 강다연 학생(프랑스어문학전공 4)은 “번역서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할 경우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학생 본인이 직접 원서를 번역하게 될 경우 배경지식이 적은 만큼 오역이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돈도 안 되고 돈도 안 주고 
  번역은 학계 내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업적 평가 시 번역서보다 논문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태원 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등재제도’가 생긴 이후 교수들의 업적을 평가할 때 ‘얼마나 많은 논문을 등재했는지’가 기준이 됐다”며 “논문을 중요시하며 번역을 저평가하는 생태계가 형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연구재단에서 발간한 「2022 국내·외 대학의 연구업적 평가제도 소개」에 따른 저서 출판 평가배점은 KCI 등재지 논문이 1일 때 번역서는 평균 0.94로 비교적 낮다. 김택규 번역가는 “책 한 권을 번역했을 때 받는 점수가 논문 한 편의 점수와 비슷하거나 낮으면 연구자는 굳이 번역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이유로 연구자들이 번역서 편찬을 등한시한다”고 비판했다. 

  중앙대의 경우 임용 심사 시 번역서를 연구 업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 ‘2024-1학기 중앙대 전임교원 초빙 지원자격’에 따르면 학과별 자격요건을 충족한 경우에 한해 국제전문학술지·국내전문학술지를 양적 평가에 반영하지만 ‘번역서 및 저역서는 불인정’이라 명시돼 있다. 진태원 교수는 “교수 임용·승진 심사에서는 등재지에 게재한 논문의 수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며 “연구자들이 번역서보다 논문을 많이 쓰는 것에 치중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낮은 번역료 역시 번역의 입지를 더 좁게 만든다. 이승우 실장은 “학술번역의 보수는 현재 원고지 한 장 기준으로 많아야 7000원 정도”라며 “번역 노동의 대가로는 박한 편”이라고 밝혔다. 이영훈 교수는 “자신의 노력이 경제적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번역에 깊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꼬집었다. 

  국내 학술번역서 출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대학출판부의 사정도 해를 넘을수록 악화하고 있다. 2002년 78개였던 대학출판부가 올해 기준 47개로 감소한 것이다. 이승우 실장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출판부와 케임브리지 대학출판부의 전체 직원수는 약 6000명 규모”라며 “반면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의 경우 100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지표가 우리 학계나 출판의 수준을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지원 체계 또한 인문사회 학술번역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진행 중인 번역 지원 사업에는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사업(명저번역)’과 문화체육관광부의 ‘세종도서 학술·교양부문 지원 사업(세종도서)’ 등이 있다. 명저번역은 동·서양 명저를 체계적으로 번역해 학술과의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해 최종 선정된 과제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세종도서는 매년 번역서를 포함한 교양도서 550종과 학술도서 390종을 선정해 정가의 90%의 가격으로 구입 후 전국 도서관 등에 무료 배포한다. 해당 사업을 통해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동시에 민간에 학술도서가 보급된다. 김택규 번역가는 “명저번역의 지원 규모가 작고 이 또한 고전 번역에만 치중돼 있어 다양성이 떨어진다”며 “학술자료의 번역·출판은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지만 보조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정부는 인문사회 학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갈수록 줄이고 있다. 교육부가 1월 발표한 ‘2024년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사업 종합계획’에 따르면 명저번역의 지원 예산은 약 15억 600만 원으로, 기존 지원하고 있던 약 16억 8000만 원에 비해 약 10.35% 감소했다. 이와 관련해 진태원 교수는 “정부에게는 항상 인문학 분야의 예산이 삭감 1순위”라고 덧붙였다. 

  학술번역이 있어야 학계가 산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학술번역이 중요한 자산임을 강조했다. 진태원 교수는 “우수한 번역이 이뤄지면 전공자의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다”며 “번역본을 통해 타 전공 분야로의 접근 또한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우 실장은 “출판 시장에서 학술서가 중요한 이유는 한 국가나 사회의 토대가 되는 콘텐츠를 생산하기 때문”이라며 “이는 곧 해당 국가나 사회의 지적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라고 밝혔다. 

  노벨상 수상자가 29명에 달하는 일본은 학술번역을 중요하게 여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정부 내 번역국을 설치해 단기간 동안 수만 권의 번역서를 출간했으며 현재까지도 학술번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정부의 학술진흥정책이 외국의 학문을 답습하는 것에서 나아가 독자적인 연구 영역을 개척하도록 이끈 것이다. 최윤영 교수는 “일본의 경우 인문사회계열의 주요 저작들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공학의 주요 도서들이 모두 번역된 상황”이라며 “해외의 학술자료를 모국어로 읽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답했다. 

  학술번역은 학문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위한 필수적인 존재다. 정은귀 교수는 “학술번역은 학문 후속세대를 키우는 것과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진태원 교수는 “번역본을 토대로 추가적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될 수 있다”며 “이는 한국의 자생적인 학문 생태계가 형성되는 길”이라고 밝혔다. 학술번역을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 한국만의 독자적인 연구 체제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이며 후속세대를 위한 토대를 탄탄히 다지는 방법이다. 

  번역의 대변혁을 기다리며 
  그렇다면 인문사회 학술번역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먼저 번역료 인상을 위한 예산 증액이 요구된다. 번역자들은 자신의 보수를 시급으로 환산하면 최저 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번역료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성환 교수는 “현재 7000원 수준인 번역료를 2만 원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며 “이를 위해 현재 3000억 원 수준의 인문사회분야 관련 R&D 예산을 1조 원 수준으로 증액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윤영 교수는 “번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질 좋은 번역을 기대할 수 없다”며 “번역에 집중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업적 평가를 대하는 학계의 태도 변화도 수반돼야 한다. 현재의 업적 평가는 논문에 지나치게 치중돼 번역은 학문적 도구로써 취급되고 있다. 정은귀 교수는 “지금처럼 연구자의 업적을 ▲해외논문 ▲국내논문 ▲저술 및 번역으로 차등해 인정하는 것이 학술번역을 가로막는 큰 원인”이라며 “번역의 종류를 구분하는 기준을 촘촘히 마련해 번역자의 노력에 합당한 연구 점수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영훈 교수는 “일본처럼 번역서에 대해 저서 이상의 높은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학출판부의 진흥을 위해 정부가 학술서의 구입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이영훈 교수는 “그나마 대학출판부에서 학술도서 출판을 진행하고 있기에 국내 학술활동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를 감안해 대학출판부에 보다 많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우 실장은 “중요한 학술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최소 500부 정도는 공공도서관이 구매할 수 있는 재정적·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번역 사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의 설립 또한 방법으로 제시된다. 진태원 교수는 “번역청과 같은 기관이 설립될 경우 매년 정부로부터 예산이 배정될 것”이라며 “이 예산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번역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원 체계 확립을 통해 번역이 사회간접자본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최윤영 교수는 “컨트롤타워 설립을 통해 기초학문 분야의 자생력이 부족한 국내의 실정에 맞춘 지원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물론 컨트롤타워의 운영은 섬세하게 이뤄져야 하며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은귀 교수는 “대부분의 대학이 교육부나 한국연구재단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따라가는 분위기”라며 “연구자들의 자율적인 번역 활동을 위해 간섭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태원 교수 역시 “관료적인 제도의 압력으로부터 학계의 자율성을 유지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름진 학문적 토양을 일구기 위해 치열한 고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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