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평범한 아이였던 김대홍 앵커(정치외교학과 85학번)는 넓은 세상을 마주하길 꿈꾸며 새로운 여정을 나선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종합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자 KBS 기자의 길을 걷는다. 이후 과학부, 사회부, 보도제작국을 거쳐 KBS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한 그는 현재 <일요진단 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다. 주로 질문을 던져왔을 김대홍 앵커가, 그의 인생 브리핑을 시작한다. 글·사진 장민창 기자 jmc17061@cauon.net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며 
진취적인 도전을 이어갔던 사람 

일본에서 마주한 세상으로 
휴머니즘을 겸비한 기자가 되다 

“좋은 언론인이 되려면 전문성과 휴머니즘을 겸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따뜻한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져야 하죠. 또 현장에서 직접 사실을 마주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느껴야 합니다. 직접 사실을 마주해야 글을 더욱 강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매주 일요일 오전 8시. 그에게는 이 시간이 일주일 중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한 주 동안 발생한 사회 현상을 짚어보며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이야기를 나눌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데스크 위에는 좋은 질문과 답변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 온 흔적으로 가득하다. 발 빠르게 세상의 흐름을 분석하고 사안의 이면을 날카롭게 통찰하는 앵커. 지금, 김대홍 앵커(정치외교학과 85학번)가 방송 데스크에 앉아 있다.  

  -현재 <일요진단 라이브> 앵커로 활동 중이다.  
  “<일요진단 라이브> 앵커를 맡은 지 4달쯤 돼 갑니다. 프로그램의 성격을 점차 바꿔나가고 있어요. 예전에는 프로그램 내에서 정치 분야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해당 포맷이 좋은 것인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고민을 해본 결과 대중들이 쉽게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초청해 앵커와 문답을 나누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죠. 앞으로는 시청자가 직접 코너를 만들거나 취재원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새로운 시도를 해볼 생각입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이 궁금한데. 
  “그냥 평범한 아이였어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했고요. 웅변대회에 나가는 등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죠. 또 어렸을 때는 자연과 자주 어울렸던 것 같아요. 제 고향이 제주도라 자주 수영하러 다니고 산에도 올라가 보곤 했습니다.”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진학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저희 아버지가 제주시장을 지내셨고 중앙대 예술대의 전신인 서라벌예대 출신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앙대 정치외교학과로 입학을 결정했던 것 같아요.” 

  -재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당시 캠퍼스 분위기가 굉장히 우울했습니다. 1985년도에 입학을 했는데 데모가 끊이지 않았죠. 캠퍼스에서 낭만을 찾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대학교 3학년 때 ROTC를 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데요. ROTC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또 ROTC를 통해 패배 의식에 절어있던 제 모습을 극복했던 것 같아요. 젊은 나이에 장교로 활동하기 위해 필요한 리더쉽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원만한 대인 관계를 쌓아갈 방법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남네요.” 

  -이후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군 복무를 마치고 제 자신을 위한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그 일이 바로 공부였죠. ROTC가 끝나자마자 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했습니다. 학위 과정 중에는 석사 논문을 재미있게 썼던 기억이 있어요. 당시 동남아의 화교들이 경제권을 지배하게 된 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말레이시아 화교 연구에 관한 논문을 작성했죠. 3개월 동안 직접 말레이시아에 방문해 자료를 찾았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또 말레이시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인터뷰를 나눈 내용을 논문에 포함하기도 했어요.” 

  -기자 생활 전 다른 일을 했다고. 
  “첫 직장을 ‘(주)대우’라는 종합상사에서 시작했습니다. 석사학위 수여를 계기로 동남아 지역 전문가로 활동했죠. 당시 철강 본부에서 일을 했는데요.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제가 맡았던 일은 지붕으로 사용할 철강 자재를 발주하고 다른 회사에 제작을 요청하는 일이었죠. 그런데 주문 중 크기를 다르게 입력해 잘못된 사이즈의 자재가 생산된 적이 있었어요. 그 일로 회사에서 엄청 혼났습니다. 다음 날 출근해보니 제가 앉아야 할 의자가 사라져 있더군요.(웃음)” 

  -KBS 제주방송총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주)대우에서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일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제가 이뤄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죠. 아버지가 원래 제주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하셨는데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되셨어요. 제 고향이 제주도이다 보니 제주방송총국에서 일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기자 초년생 때 가장 하고 싶은 취재 분야가 있었나. 
  “특파원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사회부에 있었을 때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예멘 반군 전쟁 등과 같은 종군 기사를 많이 썼습니다. 젊었을 때 기회가 닿는다면 특파원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갖게 됐죠. 과거의 경험도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있을 때와 종합상사에 근무했던 때의 경험 때문인지 자꾸 외국에 나가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일더라고요. 기자가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다양한 부서에서 기자 생활을 했는데.  
  “사실 KBS는 전문 기자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서 한 부서에만 근무하지 않아요. 기사 취재와 보도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제작도 담당했습니다. 또 KBS 안에 있는 다른 본부로 이동하기도 했죠. 편성 본부로 자리를 옮겨 편성 전략을 기획하기도 하고 드라마·예능·스포츠 전략을 짜보기도 했습니다.” 

  -기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사회부 시절 겪었던 에피소드가 가장 생각나네요. 당시 어느 공장에서 몰래 폐수를 버린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뉴스 보도 감으로 손색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여자분이 KBS에 찾아오신 겁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 보도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났다는 거예요.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여성은 제보자의 경쟁업체 관계자였죠. 그분은 제게 ‘단순한 팩트만 보지 말고 진실에 접근하는 기자가 돼 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부터 내가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과연 사회에 큰 도움이 되는 건지 고민했습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보도하지 않을 것인지 궁금하다. 
  “기자 사이에서 ‘제보는 원래 더러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한 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제보자가 왜 그런 제보를 했을지 고민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제보 자체에 집중한다기보다는 문제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살펴볼 것 같습니다. 영세업자와 관련해 구조적인 문제는 과연 없는지, 행정기관은 왜 사전에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는지를 파악해 봐야죠. 심층적인 탐사를 통해 문제를 바라보는 일이 필요해요.” 

  -2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활동했는데. 
  “일본은 한국과 시차가 없어요. 실시간으로 서울 지국과 소통하며 일을 할 수 있었죠. 아침 6시에 <KBS 뉴스광장>이 시작하는데, 리포트를 하기 위해 4시쯤 도쿄 지국에 출근합니다. 보통 일본은 4시에 신문 배달이 이뤄지더군요. 신문 배급소로 가서 신문 약 8종류를 산 후 신문 기사를 빠르게 훑었죠. 그중 한국과 관련된 기사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관련 기사가 있다면 서울 지국과 통화해서 리포트 가치가 있는지 논의해요. 이후 원고를 쓰고 리포트를 완성하죠. 굉장히 순발력이 요구되는 작업이었습니다. 또 한일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취재 도중 애를 먹었던 일도 기억나네요. 한일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일본 사람들이 취재 협조를 잘해주지 않더라고요.”

  -도쿄 특파원의 경험으로 책 『일본의 눈물』을 펴냈다.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보와 보수 진영에 따라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잖아요.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을 떠나서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싶었어요. 책날개를 살펴보면 제 할머니 사진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제주 4.3 사건’ 때 할아버지를 잃으셨어요. 이후 자식을 놔두고 재혼하셨죠.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제 아버지 입장에선 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의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죠. 저는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화해하기를 바랐습니다. 배다른 가족과도 말이죠. 
  또 이 책은 동일본 지진 당시 일본인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일인데요. 지진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후 어떤 할머니가 체육관에서 울지도 않고 담담히 계시더군요. 할머니께 ‘지진 해일이 또 올지 모르는데 두렵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어요. 가족을 잃었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없다고 말이죠. 그 모습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뷰 도중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김대홍 앵커의 말 속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오직 냉철한 시각으로 취재에 임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큰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었다.
인터뷰 도중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김대홍 앵커의 말 속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오직 냉철한 시각으로 취재에 임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큰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었다.


  -동일본 지진 당시의 철수 과정을 책에 담기도 했는데. 
  “당시 유출된 방사능이 큰 문제였어요. 방사능 수치가 계속 높아져만 가니 더욱 위험하다고 느꼈죠. 대사관 직원이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어요. 그때 도쿄대 관측소에 방문해 방사능 문제를 취재하고 NHK의 한 기자에게 기사를 작성하라고 자료를 전달해줬습니다. 그런데 보도를 하지 않더군요. 이유를 물어봤더니 ‘보도 이후 도쿄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을 염려해 보도하지 않았다’고 답변하더라고요. 진실을 알리는 것과 국가적 차원의 혼란을 방지하는 것. 둘 중 과연 무엇이 더 옳은 행동인지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한국 언론이 일본보다 훨씬 자유롭고 발전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특파원 활동을 마친 후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소 공부에 진취적인 편인가. 
  “호기심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KBS에 입사한 후 지식에 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특히 다큐멘터리 제작을 담당하면서 그 생각을 깊게 했습니다. 전문가의 인터뷰 내용만을 수집하는 것이 아닌, 연구를 바탕으로 취재하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사실 박사 논문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한 교수님이 논문 작성을 마무리하기를 적극 추천하셔서 박사 학위까지 따게 됐습니다. 담당 교수님과 국제전화로 상의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걸 무려 1년 동안 했네요.” 

  -<일요진단 라이브> 앵커를 맡게 된 배경이 궁금한데. 
  “KBS를 떠나기 전에 앵커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앵커로서 능력을 검증받지 못해 시켜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KBS 경인방송센터로 가서 앵커로 활동했습니다. 약 10달 동안 경인방송센터에서 40회 정도 앵커로 일하다 보니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더군요. 마침 <일요진단 라이브> 앵커 모집 소식이 들려온 겁니다. 간부들에게 제 영상 하나 드리고 ‘한번 보시고 괜찮으면 저 쓰세요’라고 말했죠. 다행히 반응이 호의적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일요진단 라이브> 앵커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좋은 답변을 얻기 위한 노하우가 있나. 
  “처음 인터뷰 시작할 때 ‘아이스 브레이킹’을 합니다. 취재원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죠. 본격적인 질문을 하기 전에 반드시 도입 질문을 해요. 대표적으로 그 사람과 관련된 어떤 사진 한 장을 보여주고 사진 설명을 부탁하는 질문이죠. 그러면 취재원들의 혀가 풀리더라고요. 저와 취재원 간에 라포가 형성되는 듯한 느낌도 들곤 합니다.” 

  -좋은 언론인은 어떤 요소를 겸비해야 하는지. 
  “전문성과 휴머니즘을 겸비해야 합니다. 따뜻한 가슴을 가져야 하고 머리는 차가운 이성을 지녀야 해요. 차가운 이성을 채워줄 수 있는 지식도 갖춰야겠죠. 또 취재 현장에 직접 방문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직접 사실을 마주해야 글이 더욱 강하게 써지기 때문이죠. 제보자가 아무리 사진을 갖고 온다고 한들, 기자는 현장에서 그 분위기를 느껴야 해요.” 

  -중앙대 언론동문회장을 역임 중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언론동문회가 많이 침체했어요. 선배님들이 침체한 언론동문회의 활기를 띄워보라고 하셔서 맡게 됐죠. 후배 기자들을 많이 챙겨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선배가 후배를 챙겨주고, 나중에 그 후배가 또 다른 후배를 챙겨주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해요. 그 시스템을 정착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어떤 후배 언론인을 양성하고 싶은지. 
  “이제 권위적인 언론인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검색하기만 하면 정말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잖아요. 챗GPT도 마찬가지고요. 옛날에는 어떤 소식이 들려오면 그저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시대였다면 오늘날은 다릅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이 인터넷에 검색하고 그 정보를 수정하는 시대예요.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안다는 것이 기자에겐 의미가 없습니다. 질문을 잘할 수 있는 언론인, 마음이 따뜻한 언론인을 양성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도전을 이어나가고 싶나.  
  “이제 KBS에서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현재 맡고 있는 <일요진단 라이브> 앵커나 대담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또 앵커로서 활동할 수 있는 더 큰 기회가 있다면 그 무대에도 도전하고 싶죠.”

  -인간 김대홍의 목표는 무엇인가.  
  “존경받는 언론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언론인이 되고 싶습니다. 언론인은 진영 싸움이나 정치 갈등, 사회 혼란 속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또 발전적인 사회로 전진하게끔 하는 일도 언론인에게 필요하죠. 그런데 요즘 언론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부끄럽지 않은 언론인이 되기 위해 항상 고민할 겁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늘 고마운 존재입니다. 저희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사촌 동생 그리고 제 조카까지 중앙대를 다녔죠. 제가 인생을 살아오는 데 있어 늘 중앙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다닐 때는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는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뜻깊은 말인 것 같아요. 중앙대 후배들도 선배들과 함께 기를 펴고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자 시절 손정의 소프트뱅크 창업주를 인터뷰하는 김대홍 앵커. 기자 초년생 시절 그는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특파원을 해야겠다는 큰 목표를 세웠다. 사진제공 김대홍
기자 시절 손정의 소프트뱅크 창업주를 인터뷰하는 김대홍 앵커. 기자 초년생 시절 그는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특파원을 해야겠다는 큰 목표를 세웠다. 사진제공 김대홍
본인이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과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김대홍 앵커. 취재를 향한 그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사진제공 김대홍
본인이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과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김대홍 앵커. 취재를 향한 그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사진제공 김대홍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김대홍 앵커는 KBS 도쿄 특파원이었다. 그가 마주한 슬픔에 빠진 일본의 모습은 그의 기자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됐다.사진제공 김대홍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김대홍 앵커는 KBS 도쿄 특파원이었다. 그가 마주한 슬픔에 빠진 일본의 모습은 그의 기자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됐다.사진제공 김대홍
KBS를 떠나기 전 앵커를 맡고 싶었던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결국 앵커의 자리에 올랐다.사진제공 김대홍
KBS를 떠나기 전 앵커를 맡고 싶었던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결국 앵커의 자리에 올랐다.사진제공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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