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하며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던 김성호 가수(건축미술학과 77학번)는 아직 가슴에 음악을 향한 사랑을 품고 산다. 음악과 현실 사이를 끝없이 고민하다가 결국 음악의 길을 선택한 그는 1989년 1집 앨범 <김성호의 회상>을 발매한다. 세대를 불문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다섯손가락의 <풍선>, 황규영의 <나는 문제없어>도 모두 그의 손을 거친 노래다. 앞으로 많은 이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이 아직 살아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민창 기자

 

사진 변준혁 기자
사진 변준혁 기자

근사하고 은유적인 가사로 
이야기를 노래하던 신사

천사의 모습을 떠올리며
세상을 관찰했던 가수


“제 감정을 고이 간직했다가 곡을 쓸 때 하나씩 그 감정을 꺼내 보곤 해요. 누구나 같은 양의 행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한 번에 발산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끼고 아껴서 행복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죠. 저는 20대 때 느낀 소중한 감정을 음악에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개구쟁이였던 한 소년은 형이 작성한 시 한 편을 보고 작곡의 매력에 빠진다. 대학에 입학한 후 청년으로 성장한 소년은 ‘블루드래곤’ 밴드 동아리에서 연주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꿈꾼다. 이후 그 청년은 앨범을 내는 가수가 돼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찬란한 젊은 시절을 보낸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가수 김성호(건축미술학과 77학번)다. 은유적이고 근사한 노랫말로 많은 이들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던 그를 만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되돌아보고 음악을 향한 그의 사랑을 확인했다. 

  -본인의 어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나. 

  “굉장히 외향적이고 개구쟁이였죠. 중학교 때 음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제가 작곡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큰형 책상에서 발견한 시 한 편이었습니다. 큰형이 직접 쓴 시에 멜로디를 붙여가며 작곡을 해보니 음악에 빠져든 것 같아요. 개구쟁이 같던 성격도 진지하게 변했죠.” 

  -중앙대에서 재학하면서 블루드래곤 밴드 활동을 했다고. 

  “대학 시절 중 블루드래곤에 몸담으며 선배들과 함께 연습하고 공연했던 것이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굉장히 위험했던 순간이 강렬하게 기억나기도 하는데요. 예전에 캠퍼스 내에 대학극장이 있었습니다. 한겨울에 대학극장에서 친구가 베이스를 연주하려다 악기 선이 합선돼 연기가 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위험한 상황이죠. 그런 고생을 함께 겪으면서 연습했던 게 생각이 나네요.” 

  -1978년 제1회 TBC 해변가요제에 참가했다. 

  “블루드래곤에서 활동하는 동안 계속 가요제에 출전했습니다. 첫 가요제는 ‘제1회 MBC 대학가요제’였어요. 1학년 여름방학 때 학교에서 가요제 공고를 냈는데 친구가 지원서에 제 이름을 적어서 제출해버렸습니다. 평소 제가 음악을 좋아하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갑작스레 출전하게 된 가요제에서는 준결승에서 아쉽게 탈락했습니다. 이후 가요제의 문을 계속 두드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작곡을 만들어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하다 보니 해변가요제 본선에 올라가고 장려상도 받게 됐네요.”  

  -음악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는지. 

  “집에서는 제가 음대에 진학하는 것을 굉장히 반대하셨어요. 결국 건축 분야에 종사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건축학부에 진학했죠.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자꾸만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학창 시절 합창부 활동을 하며 제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죠. 당시 클래식을 들으며 지휘를 흉내내보기도 했습니다. 또 송창식 선배님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는데요. 송창식 선배님 노래를 따라하며 음악을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진로에 관한 결정을 내리면서 정말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음대 진학이 좌절된 상황에서 록밴드 음악을 듣고 또다시 진로에 관한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이것을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마냥 음악만 할 수는 없었죠. 군대도 가야 하고 시험공부도 해야 하니까요.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을 때쯤 선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후배와 동료에게 조언을 잘 해주시곤 했던 선배가 있었거든요. 그 후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서귀포 쪽에 위치한 외돌개에 한 바위가 있어요. 그때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난 뒤 그곳에서 저 혼자 5시간 동안 진로에 대한 고뇌에 빠졌죠. 그리고 결국 음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진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다 보니 바다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웃음)”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서 먼저 음악에 발을 내딛었다. 

  “사실 제가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이 아닙니다. 기타를 치면서 잔잔하게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죠. 그러다 편곡하게 될 기회가 생겼는데요. 저만의 앨범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뛰어난 가창력보다는 가사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노래가 있다면 그것이 나의 노래이겠거니 싶었죠. 그때부터 가수로서의 행보도 시작된 것 같습니다.” 

  -<풍선>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당시 ‘다섯손가락’ 멤버들과 친분이 있었어요. 당시 다섯손가락은 1집 앨범에 수록된 <새벽 기차>라는 노래로 히트를 쳤죠. 그런데 이 친구들이 2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빠른 박자의 노래를 원하더군요. 그래서 쓰게 된 곡이 바로 <풍선>입니다. 그때 제가 대학생이었고 다섯손가락 멤버들은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매우 앳되게 보였거든요. 그래서 발랄하고 동심을 자극하는 멜로디로 <풍선>을 작곡했습니다. 그때그때에 맞게 곡을 충실히 쓴 것뿐인데 많은 분들이 수십 년이 지나도 기억해주시고 불러주시니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작사·작곡을 할 때의 철학이 있는지 궁금하다.  

  “특별한 철학은 없습니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제 감정을 고이 간직했다가 곡을 쓸 때 하나씩 그 감정들을 꺼내 보곤 합니다. 저는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누구나 같은 양의 행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행복을 한 번에 발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끼고 아껴서 행복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저는 20대 때 느꼈던 소중한 감정을 음악에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쓴 곡 중 애착이 가는 곡이 있는지. 

  “모든 곡에 다 애착이 가긴 합니다만, 1집에 <마지막 한마디 안녕>이라는 노래가 수록돼 있어요. 평소 좋아하는 리듬으로 편곡을 한 노래이기도 하고 가사도 제가 직접 작성해서 굉장히 아낍니다. 또 2집에는 <우리는 빛을 따라가야 해>라는 노래가 있어요. 가사와 멜로디를 참 좋아하죠. 3집 수록곡 중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노래는 제가 대학교 3학년이던 당시 축제 기간에 쓴 곡입니다. 화려한 축제가 모두 끝나고 느꼈던 공허하고 외로운 감정을 집에 와서 멜로디로 풀어낸 노래죠.” 

  -1989년 1집에 수록된 <김성호의 회상>의 가사가 근사하다. 

  “청년 때만 느낄 수 있는 사랑과 외로움, 그리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경험을 자양분 삼아 가사를 작성했습니다. 또 어렸을 때 시집이나 책을 많이 읽었는데 가사의 문장을 구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작사할 때 ‘최소한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사를 쓰자’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했던 게 청중들이 제 가사를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제목이 단순히 회상이 아니라 ‘김성호의 회상’이다. 제목에 본인의 이름을 넣는 게 흔치 않은데. 

  “저는 제목이 음악 전체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노래를 만들 때 회상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며 가사를 쓰진 않았어요. 작곡을 먼저 했거든요. 작곡 이후엔 자연스럽게 사람이 만나고 이별하며 마주하는 야릇한 장면들을 가사로 채워 넣었죠. 제목을 짓기 위해 가사를 살펴보니 ‘회상’처럼 그 이야기에 적합한 단어는 없는 것 같더라고요. 또 그 당시 회상이라는 제목이 무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 첫 앨범이기도 하니까 이름도 알릴 겸 <김성호의 회상>으로 하자고 뻔뻔하게 결정했어요.(웃음)” 

사진제공 김성호
사진제공 김성호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 
그녀는 조그만 손을 흔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너의 눈을 보았지. 으흠. 

하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어.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지만 
멀어져가는 뒷모습 보면서 
두려움도 느꼈지. 으흠. 
나는 가슴 아팠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장 남지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맘도 편하지는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김성호의 회상」 
2001년 5집에 재수록- 

 
-첫 앨범을 내고 기분이 어땠나. 

  “사실 노래를 연습하는 게 버겁게 느껴졌어요. 원래 노래를 불러오지 않았으니 말이죠. 당시 스튜디오에서 곡 쓰고 편곡하고 녹음도 해야 하니 엄청 바빴어요. 또 앨범도 내야 하니 신경 쓸 게 많았죠. 음정이 형편없던 때라 녹음을 마무리하고 나서는 그냥 후련하다는 감정만 들더군요. 녹음을 다 마치고 앨범을 발매할 때가 여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89년 여름, 비가 내리던 순간이 기억나네요.”  

  -제목을 짓거나 작사할 때 고민을 많이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하진 않았어요. <찬바람이 불면> 같은 경우에는 곡을 쓰다가 갑자기 ‘찬바람이 불면~’이라는 노랫말이 생각나더라고요. <한번만 더>의 경우에도 멜로디를 쓸 때 ‘헤이~ 라리라리라~’라는 추임새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작사가한테 이 부분에 ’헤이‘라는 가사를 꼭 넣어달라고 부탁했죠. 노래에 맞는 특별한 가사가 떠오르면 제가 직접 작사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작사가분에게 특정 단어를 포함해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아요.”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를 작사할 때 왜 천사를 떠올린 건지 궁금하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정말 영혼이 맑고 천사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또 우리가 살면서 커피를 자주 마시잖아요.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좋은 사람 많이 만나봤어요?’와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죠. 저에겐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 있나요?’라는 질문이 떠오르더라고요. 그 문장을 토대로 작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곡은 제가 유일하게 가사를 먼저 쓴 곡이에요. 가사를 모두 쓴 다음에야 멜로디를 붙였죠.”  

  -가사 중 ‘허름한 청바지에 플라스틱 귀걸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비싸고 아름다운 보석을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이나 본성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당시 길거리엔 리어카가 있었는데 플라스틱 귀금속을 많이 팔았거든요. 비싸진 않아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았죠. 순수하고 수수한 것을 보며 천사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어요. 천사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묘사했던 것 같습니다.”  

  -<그사랑 그사랑 어디서 오는 걸까>는 종교와 관련된 노래라고. 

  “원래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인 2집을 제일 먼저 준비했어요. 신앙인으로서 종교와 관련된 음반을 먼저 발매하는 게 하나의 도리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첫 앨범을 가스펠 음악으로 구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 신앙이 그 정도로 깊은 것 같지 않아서 대중가요 분위기가 나는 곡을 만들었어요. 곡 후반부에 합창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보통 찬양할 때 합창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래, 이 노래의 후렴부에서는 떼창을 하는 게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학교 후배와 친구들 다 불러서 몇 번씩 녹음했던 기억이 나네요.” 

  -평소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인지. 

  “어렸을 때 관찰을 꽤 즐겨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명동 중심가에 백화점 하나가 있었어요. 그 백화점 안에 앉아서 사람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또 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제 마음대로 행동을 해석하는 걸 즐겼죠. 내 생각대로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상황을 정의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러한 경험이 작곡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 근황은 어떤가.  

  “예전만큼 곡이 잘 써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음악을 대하는 기준이 높아지니까 장벽이 하나씩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음악을 만들기엔 점점 힘들어지거든요. 음악을 만들어놔도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작업이 더디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죠. 나중에 히트곡도 한 번 더 내보고 싶어요.” 

  -KBS <백투더뮤직>을 통해 오랜만에 얼굴을 비췄다. 

  “담당 PD가 다섯손가락 관련 영상을 제작하면서 저한테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느닷없이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고 하더군요. 사실 주로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노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라이브로 노래하다 보면 음정도 떨어지고 호흡도 맞지 않으니까 노래에 집중하기 어렵죠. 그래서 최대한 스튜디오 외부에서 노래 부르는 걸 피했는데 해당 프로그램의 취지가 너무 좋더라고요. 해를 거듭할수록 ‘나만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필름 하나 정도는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출연을 결심했습니다. 많은 분이 반가워해 주시던데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네요.”  

  -최근 <나는 외로움 그대는 그리움>을 영국 록밴드 ‘The Escape Club’이 리메이크했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처음 리메이크된 곡을 들었을 때, 굉장히 세심하게 편곡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편곡할 때 많이 고민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듣다 보니 원곡은 생각이 안 나고 리메이크된 노래만 맴돌더군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번 리메이크를 계기로 어느 정도 그 꿈을 이룬 것 같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앞으로 음악과 함께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지. 

  “음악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의가 많아지면 벽이 많아지고 결국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지 못하니까요. 어떤 장르의 곡을 만들든 간에 대중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또 제 인생을 살면서 종교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긍정적인 선물을 다시 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큽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에요. 중앙대에 오지 않았다면 밴드를 하지 않았을 테고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면서 삶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중앙대를 통해 블루드래곤을 만났고 좋은 선배들을 만나 직업을 정하는 데 큰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인생에 있어 아주 감사한 존재예요.”

‘블루드래곤’ 밴드 동아리에서 기타를 잡으며 음악을 향한 열망을 키워가던 대학생은 1978년 제1회 TBC 해변가요제에 출전해 음악인을 꿈꿨다. 그 때 원했던 음악인의 꿈을 이루고자 그는 수많은 고뇌를 거쳤고, 마침내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앨범을 세상에 선보였다. 사진제공 김성호
‘블루드래곤’ 밴드 동아리에서 기타를 잡으며 음악을 향한 열망을 키워가던 대학생은 1978년 제1회 TBC 해변가요제에 출전해 음악인을 꿈꿨다. 그 때 원했던 음악인의 꿈을 이루고자 그는 수많은 고뇌를 거쳤고, 마침내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앨범을 세상에 선보였다. 사진제공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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