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어려움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지난 10월 29일, 사진부 기획을 위해 이태원에 방문했다.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엔 기자와 유튜버 등이 뒤엉켜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기자들의 사다리가 골목 입구를 틀어막아 정작 유가족들은 지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추모를 위한 장소에서, 추모보다 자신들의 취재를 우선시하는 기자들의 행위에 화가 났다. 하지만, 결국 나도 타인의 어려움을 그저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갈 곳 없어진 분노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타인의 고통』의 저자인 수전 손택은 현대 사회가 누군가의 괴로움을 담은 이미지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이미지들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고, 또 그 이미지에 측은해하거나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이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일까?  

   수전 손택은 이미지 속에 표현된 고통은 그 이미지만을 기억하게 한다고 강조한다. 고통받는 타인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우린 그저 타인이 고통받는, 그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에만 관심을 표한다.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과 다름없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입장에서도 고통에 공감하기보단 고통스러운 현상에만 집중한다. 소위 ‘밸류’가 있는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자극적인 이미지를 생산한다. 타인의 고통이 더욱 괴로워 보이게 잡는다. 나의 모습을 다른 이를 통해 비춰보고서야, 마침내 내가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장에서 ‘타인’과 직접 접촉할 때도, 나 역시 그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상황만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린 타인의 고통에 어떻게 공감해야 할까? 2주 전 구룡마을에 취재를 다녀왔다. 취약계층의 겨울나기에 관한 취재였는데, 우연히 한 주민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평소였다면 기계적으로 취재를 마치고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 대화하며 정이 든 걸까. 타인의 고통에 관해 고민하던 차여서 그랬을까? 발걸음을 쉬이 뗄 수 없었다. 겨울 추위를 덜어주고 싶었다. 단열재 설치를 돕기로 약속한 뒤 돌아오는 길, 일전에 느꼈던 혼란스러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해결책은 매우 간단했다. 타인의 고통을 측은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도움을 행하면 된다.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 줄 수 있다. 보는 이들에게 타인을 측은하게 여길 계기를 만든다. 그렇지만 이런 사진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도록 돕지는 않는다. 타인의 고통에 충격받고, 측은해하는 것으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연민이 행동으로 나아가는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연민 대신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문준빈 사진부 정기자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