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에 가려진 접경의 일상 
십자군 원정은 공존과 교류 촉진해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중동’이 발칵 뒤집혔다. 끝없는 분쟁의 장. 중동은 우리에게 그런 지역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과연 중동은 항상 분쟁지역이었는가? 분명 중동에서 분쟁의 역사는 복잡하고도 민감한 주제이다. 하지만 그 뒷면을 보면 공존의 역사도 찾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십자군 원정이다. 오늘 우리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중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무슬림에게 정복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소집된 1차 십자군 원정은 그 목적을 달성하고 레반트(Le­vant,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부근) 지역에 십자군 국가들을 건국했다. 비록 이러한 원정이 흔히 종교 전쟁으로만 인식되곤 하지만, 이는 십자군의 복합적인 성격을 간과하는 처사다. 이미 학계에서는 종교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십자군 원정의 동인을 분석해 왔다. 

  ‘우트르메르(Outremer, 바다 건너의 땅)’라고 불렸던 십자군 국가들은 사방이 적이었기 때문에, 외교와 관용 정책이 생존에 필수적이었고 공존은 일상이 되었다. 서유럽 출신의 지배층과 무슬림, 유대인, 그리고 베두인 피지배층은 각자 고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교도와 무슬림, 혹은 십자군과 ‘이교도’로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은 채 공존했다.  

  십자군 국가들은 그리스도교와 십자군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곳이 아닌, 전례를 찾기 힘든 다양성이 공존했던 공간이었다. 물론 이러한 다양성의 공존이 종교의 전면적인 융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속한 사람들의 성격을 점차 변화시켰다. 이중 언어 사용자들이 출현했고, 일부는 서로의 경계를 넘기도 했다. 세대가 지날수록 세계관은 더 유동적으로, 위계성은 덜해졌으며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도 이슬람 세계도 아닌 혼종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원정은 장기적으로 이슬람과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다양한 교류를 촉진했다. 먼저, 지리적으로 두 세계의 중간지점에 자리한 도시들의 교역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1차 원정 이래로 더욱 활발한 지중해 교역을 벌였다. 그들은 비단과 향신료, 설탕 등을 사들여 서유럽에 판매했고, 모직물과 목재, 곡물 등을 이슬람에 수출했다. 레반트의 십자군 국가들과 이슬람 세력들 모두 이 교역으로 호황을 누렸다. 십자군 원정은 양측의 지적 교류를 촉진하기도 했다. 이슬람 학자들은 아랍어로 번역한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을 연구해 오고 있었다. 십자군 원정은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러한 문헌들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고전 문명의 재발견은 학문적인 차원에서 보수와 진보 세력 간의 분열을 유발했고,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성당과 수도원 학교를 뛰쳐나왔다. 이것이 최초의 대학들이 탄생한 시발점이었다. 

  십자군 원정 시기 중동은 대표적인 분쟁지역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면에는 공존의 일상도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 또한 ‘중동이 언제나 분쟁지역은 아니었다’라는 관점을 통해 중동에 대한 이해를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과 중세접경연구팀 

구정미(역사학과 석사 1차), 김은혜(독일유럽학과 석사 3차),  

안성민(역사학과 석사 2차), 왕판(역사학과 석사 3차),  

이진수(역사학과 석사 4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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