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해적이란 상상 속의 동물에 가까워서, 한 톨의 역사적 지식 위에 각종 매체에서 꾸며낸 이미지를 되는대로 덧입혀 악당에서 영웅까지 이도 저도 아닌 형상으로 살아날 테다. 후크 선장의 무시무시한 갈고리, 럼주를 끼고 사는 잭 스패로우의 알코올 중독증, 명랑 소년 루피의 패기로움이 출처를 감추고 한데 뒤섞인다. 어딘가에는 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전우치 같은 해적도 있겠지. 내게도 해적이 있다. 뮤지컬 <해적>의 캡틴 칼리코 잭. 

  한때 아르바이트했던 업장에는 장애인 고용자가 있었다. 타 근무자들과 달리 업장 청소만이 업무였던 그와 마땅히 교류할 기회는 없어 가끔 눈인사를 주고받는 정도로 지냈다. 오다가다 그를 볼 때면 쉼 없이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중이었다. 나도 종종 하는 업무였지만, 소스가 가득 묻은 꼬치를 손으로 집어 드는 일이나 터진 쓰레기봉투를 수습해 멀리 쓰레기장까지 가져가는 일은 꺼려지기 마련이었다. 좀 덜 열심히 해도 티 안 날 텐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 날은 조회 시간에 단체 손님 등으로 손님이 아주 많으리라는 예고가 내려졌다. 개장 시간까지를 우연히 같이 기다리게 됐다. 공연히 장갑을 벗었다 꼈다 하며 시간을 죽이다가 오늘 손님이 많다는데 걱정된다며 혼잣말 비슷하게 말을 걸었다. 대답을 바라고 던진 말은 아니었는데. 그때 돌아온 답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이상해진다. 여상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손님 많으면 좋아요. 쓰레기 많이 생기잖아요.” 순간, 실언 연발이었던 사회복지학과 면접장에서처럼 주룩 땀이 흘렀다. 영하를 오가는 한겨울 야외에서. 지금 다른 학문을 전공하고 있지만, 만약 그 길로 사회복지학과에서 수학했더라도 그때 들은 말보다 가치 있는 이론이나 교수의 가르침 같은 건 없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전투에서 사람을 죽이지 못해 버려진 캡틴 잭은 이렇게 노래한다. 보물을 찾는다면, 작은 섬 하나 차지하고 뭔가 모자란 해적들의 지상낙원을 만들겠다고. 육지에서도 쫓겨나고 바다에서도 길을 잃은 슬픈 해적들이 모여 사는 그런 따뜻한 작은 섬을. ‘아직은’, ‘겉으로는’ 외로운 해적이 아닌 내가 감히, 내가 가진 보편성 ─ 으로 치부되는 요소 ─ 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노동의 신성성을 깨달았다며 퉁 쳐서 거칠게 결론지을 것도 아니다. 다만 특수학교를 짓지 못하게 시위하고, 노키즈존을 만들고,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를 중단하자는 이 사회에서, 잭이 말하는 지상낙원이 얼마나 절실한지 온몸으로 느꼈던 경험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소외시키고 밀어내다 보면 결국 다음 차례는 나 자신임을.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세상의 온기를 슬퍼하면서도, 언 입술을 달래어 더운 김을 내쉬어 본다.

 

 

 

 

 

 

신지윤 여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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