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에서 죽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성운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15분쯤 비봉산 자락을 걸어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이 죽주산성이다. 죽주산성으로 가는 길은 산 입구에서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되어 산성으로 향하는 동안 내내 숨을 헐떡여야만 했다.

산의 골짜기를 끼고 위치한 죽주산성의 특징은 해발 3백70미터, 본성 1천6백90미터, 내성 2백70미터, 외성 1천5백미터의 3겹의 암석으로 축조된 성이라는 점이다. 또한 견고하며 성의 남문 뒤로는 성에 비축할 식량과 식수를 운반하던 곳으로 추축되는 큰길이 나 있어 성 축성 당시 어떠한 기술력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성의 웅장함이 한 몸에 와닿았다.

삼국시대 백제가 도읍을 위례성으로 정했을 당시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죽주산성은 고려 고종 19년, 1232년 몽고군 침입 당시 몽고군을 물리친 곳이며 고종 23년 몽고군 재침입시 송문주 장군이 죽주방호 별감을 이곳에 설치하여 15번이나 몽고군을 격퇴시킨 역사성이 깊은 유적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에는 변이몽 장군이 이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2만명이 왜군을 죽주산성의 유리한 방어적 특성을 이용하여 35번이나 격퇴시킨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근 5년 동안이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유적의 파손상태가 심각하다. 당시 성내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기창과 식량창고 건물들은 모두 소실되고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송문주 장군의 전승송각과 사당이 고작이다.

답사 도중 지역유지로 보이는 노인은 "죽주산성은 안성의 그 어떤 산성보다도 중요한 유적인데 관리를 책임진 행정관청은 관리에 소홀하고 지역 주민들은 뒷짐만 지고 있으니 걱정이다"면서 유적관리의 소홀함에 안타까움을 보였다.

사실 남아있는 전승송각과 사당마저도 기와가 깨지고 사당 주변의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으며 비가 세차게 오면 누수현상까지 보이는 등 유적의 보존상태가 심각할 지경에 이른다.
분명 역사적 교훈이 되는 곳이고 전승지로서 상당히 중요함을 가진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우리 조상들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의심케 한다.

산성을 뒤로하고 내려오면서 죽주산성의 성벽이 노을 빛을 머금은 모습은 발이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아직도 죽주산성에서 호령하고 있는 송문주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 하다.

<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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