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배타적 블록권을 형성하면서 한·중·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연대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근대성이 실패하고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동아블럭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섣부른 낙관보다 여러 변수를 고려한 신중론이 득세하고 있는 가운데, 동아시아 담론의 흐름을 점검해 본다. <편집자 주>

지금까지 여러 논자들에 의해 제기된 각양의 동아시아론을 되돌아보면 대략 다음의 세가지 유형으로 갈래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권이라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동아시아론과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대안적 의미로서 제출되는 동아시아 문화론, 그리고 분단 극복과 자본주의 극복까지를 지향하는 동아시아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아시아론이 갖는 최대의 난점 가운데 하나는 이들 담론이 일국에 한정된 담론이 아니라 동아시아라는 특정한 지역과 특정한 문화, 특정한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담론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동아시아론을 둘러싸고 갖가지 쟁점들이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론의 성립 가능성 자체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동아시아 내부가 한데 묵일 수 있을 것이며, 특히 한국과 중국, 일본의 경우 현재 각기 상이한 정치, 경제적 환경을 넘어 어떻게 구체적인 연대를 이끌어 낼 것이냐는 점에 의문을 표시한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만한 일이다. 때문에 동아시아이론이 보다 실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상황에 대한 보다 냉철한 이해가 절박해진다.

중국의 경우, 90년대 문학 비평계의 핵심적 쟁점 가운데 하나는 '중국 제3세계 문화론' 또는 '제3세계 문화론'이다. '중국 제3세게 문화론'의 궁극적 지향은 "근대성(modernity)에서 중화성으로"이다. 핵심적 주창자들은 원래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해체와 탈식민주의를 결합시키는가 하면,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비판을 중국식으로 전도시켜 세기말 중국 문화와 중국 문화의 총방향으로 중화성(中和性:Chineseness), 즉 본토성의 건설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들은 서구와 중국 사이에 어떻게 중심과 주변의 억압적 관계가 이루어져 왔고, 중국이 어떻게 서구라는 중심에 의해 타자화되어 왔는지를 점검하고 폭로하는데 지적 관심을 경주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아편전쟁이래 중국의 역사란 서구 근대성에 의해 식민화·타자화 되는 과정이었고, 이제는 그러한 서구 근대성을 대신하여 본토성, 즉 중화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그러한 중화성을 '중심' 또는 '구심력'으로 삼아 한국 등 동아시아까지를 망라한 중화문화권을 건립. 새로운 세계 문화와 세계 문학을 선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제3세계 문화론자들의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90년대 중국 학술계에는 중국 전통 문명의 가치를 역설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흥기하고 서구 문명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에 고무되어 21세기의 바람직한 문명의 대안은 중국의 전통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중국 전통 사상의 천인합일(天人合一) 등의 관념이 서구 근현대 문명의 가장 큰 병폐인 자연과 인간의 분리와 대립을 치료할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근대이래 국제 관계가 사회적 다원주의에 기초한 서구 문명에 의해 주도된 결과 인류는 끝없는 재난 속에 빠져 있다면서 이제는 그러한 서구 문명을 대신하여 평화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 중국 문명으로 세계를 지도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 지식계의 이러한 주장들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배타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긍정성을 갖는다. 개혁개방 정책 채택 이후 중국 지식계에 만연되었던 서구에 대한 지나친 경도와 근대화에 대한 소박한 낙관적 비전을 비판한 점, 그리고 중국 사회가 세계 시장경제에 편입되어 가면서 중국 사회와 문화가 어떻게 서구화·식민화되어 가고 있는지를 비판한 점에 있어서는 나름의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 근대성을 해체·비판하면서 그 서구 근대성의 자리를 중화성, 즉 중화 민족주의로 채우고 있다. 이는 결국 서구라는 낡은 중심을 해체하고 중화라는 새로운 중심을 만들려는 기획인 것이다. 그들이 구상하는 동아시아를 망라한 중화문화권의 중심은 중화성이며, 이때의 각 나라 사이의 연대란 그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즉 중화라는 중심을 승인함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연대다.

90년대 중국 지식계의 논의에서 보듯 서구 근대성 비판이 중화주의와 같은 또 다른 중심 만들기로 왜곡된 역사적 사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일본의 근대 극복론이 그것이다. 일본의 근대 극복론의 요체는 반서구이다.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화,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시키면서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했던 것도 반서구에 기초하였던 것이고 그 반서구의 중심은 일본이었다. 일본의 대리전쟁론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전후 일본에서 유행한 다케우찌 요시미 등의 아시아주의의 운명 역시 그러하다. 다케우찌 요시미의 아시아주의는 유럽 근대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근대의 극복을 사상적 목표로 삼았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충분히 전복적이었다. 서구 근대를 넘어서려는 기획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서구적 연대 의식에 집착한 결과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변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변모되고 만다.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동아시아론은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나 대만에서 제출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론이 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동아시아론이 또 다른 중심 만들기로 귀결되는 것에 대한 경계이다. 중심을 해체하되 또 다른 중심의 형성이라는 유혹을 경계하는 일, 그러면서 서구와 동아시아, 근대 추구와 근대 극복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 동아시아론이 단순히 담론의 수준을 넘어 이 세계를 변혁하고 새로운 문명의 단초를 마련하는 창조적 비전이 되기 위해서 해결하여야 할 필수적인 과제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이욱연 <이화여대 중문과 강사>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