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시대’가 되면서, 세상이 참 시끄러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단지 병존할 뿐만 아니라, 공존을 위한 방도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진정한 배려는 무엇인가. 아마도 상대에게 ‘여백’을 주는 겸양의 자세가 아닐까. 노자는 ‘물’과 같은 처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은 트이면 트인 대로 가고, 막히면 막힌 대로 쉰다. 또한 물은 담는 그릇의 모양대로 담긴다. 물의 이러한 유연함과 겸양의 자세를 노자는 눈여겨본 것이다.  

 사람이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편안하게 내버려 둔다면, 조금 더 공존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이 항상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을 버리고, 타인에게 자리를 권함으로써 나 자신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여백이 별로 없어 보인다. 24시간 물샐틈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는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얹는 것 같다. 가끔은 SNS나 뉴스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방법이다. 정보가 힘이라지만, 자신의 안식을 위해 힘으로부터 멀어질 필요도 있다. 

  함께 일할 땐 불필요한 오해는 과감히 쳐내고 공동의 목표를 생각하면 어떨까. 비판적 사고라는 시작이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만 키우는 끝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많다. 각자 순리와 대의를 따르고 서로의 말을 귀담아들으면 저절로 뜻이 모인다.  

 경청과 겸양은 모두 여백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색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색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한다. 

  여백의 미는 본래 동양화에서 온 것이다. 동양화는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한다. 외면보다 내면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고를 반영한 것이다. 대상의 표현이 간결하면 여백이 강조된다. 이를 통해 감상자에게 여유를 주고, 작품을 마음속으로 한층 더 깊이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여백의 미를 담은 작품은 많지만,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이 기억에 남는다. 흥선대원군은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에게 난 그리기를 배웠는데, 그의 호를 딴 <석파란(石坡蘭)>은 아주 유명하다. 스승 김정희는 제자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허리를 구부려 난초 그림을 보니 이 늙은이라도 역시 마땅히 손을 들어야 하겠다.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보다 나은 작품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면전에서 아첨하는 한마디 꾸밈말이 아니다.” 

  제자의 그림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스승의 넉넉한 마음씨가 느껴진다. 서로에게 소탈한 칭찬을 내어주는 것도 공존의 작은 시작일 것이다. 삶의 여백의 미는 이처럼 작은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도 공감과 배려를 통해 삶에서 여백의 미를 구현해보면 어떨까.

남재준 동문
공공인재학부 19학번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