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살아온 환경, 겪은 경험 등이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수많은 타인을 만나게 되죠. 따라서 우리가 다양한 생각을 마주하는 건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 다양한 생각에는 내 의견과 반대되는 생각도 존재할 것입니다. 기자의 칼럼은 그런 생각의 다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됐습니다.


  기자는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친구들과 정치·철학·역사 등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습니다. 토론은 발언 제한 시간도 없고 정해진 형식도 없었습니다. 편하게 누워서 말하기도 부지기수였죠. 그러나 그런 토론에도 모두가 지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다른 친구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막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기자는 그때의 토론을 정말 소중한 기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친구의 날 선 비판은 기자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재고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 기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의 논리는 기자가 미처 조명하지 못했던 것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지금 기자의 생각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19세기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가 왜 생각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자유론』에서 억압당하는 생각이 어쩌면 진리이거나 또는 일부 진리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억압당하는 생각이 설령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할지라도 토론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반성하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제 기자는 다시 다른 물음을 던집니다. 왜 기자는 생각의 다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질문했을까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념·젠더·세대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갈등을 봉합하고 사회적 화합을 도모해야 할 정치인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상대 진영의 생각을 혐오하고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있죠. 생각의 자유가 부재해 생긴 갈등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인데도 말입니다.


  기자는 다시 밀의 『자유론』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밀은 우리에게 듣기 싫은 남의 생각도 일단은 들어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자청(自請)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상대 당 또는 상대 세력이 발언할 때, 집단 퇴장하거나 야유하는 우리 정치인들이 꼭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는 밀의 제언처럼 타인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경청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비판을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치인들이 그토록 떠들어대는 ‘자유’를 실천하는 가장 기초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고등학생의 순수한 토론장이 더 넓은 우리 사회에서도 실현되길 원합니다. 비판을 마주할 용기와 그로 인한 생각의 자유로 이 갈등을 함께 치유하길 소망해 봅니다.

 

 

 

 

 

 

채건우 대학보도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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