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다쳤다. 깁스한 다리를 이끌고 학교로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 건너기도 전에 빨간 불이 되어버린 횡단보도 신호, 급한 경사로 이루어진 후문 길, 생각보다 많고 가파른 계단. 등굣길이 위협적으로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다리가 나을 때까지는 교통비가 아깝지만, 버스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버스만 타면 학교 가는 길이 편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높은 버스 계단과 사람으로 가득 차서 디딜 수 없는 통로는 인도로 걸어가는 게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다친 다리만 아니었으면 힘들지 않았을 상황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더 서러웠던 건 눈치가 보여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던 교통약자석이었다. 다리를 다친 기간 동안 탑승했던 버스와 지하철에서 교통약자석에 앉아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곳에는 누군가 앉아있거나 비어있다고 하더라도 앉기에는 눈치 보이는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깁스하고 등교하는 길에 버스에서 양보받은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 외에는 불안하게 한 다리와 두 팔로 사람 많은 버스에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 많던 사람이 우르르 나오는 버스에서 탈출해 돌아보면 나처럼 발이나 다리를 다친 학우들은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목발을 짚고 있었는데 앉아서 오지 못한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그동안의 버스와 지하철 속 나는 어땠는가. 그리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본가에 가는 데 일어서서 가기 힘들다고 지하철에서는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한쪽 눈은 버스의 출입구를 보지만 다른 한쪽 눈은 창밖을 보며 ‘아무나 양보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모르는 척하기도 했다. 부끄러워졌다. 막상 다친 후 양보를 바라는 게 모순적이었다. 양보하고 배려하자고 생각하지만, 나조차도 그러지 못한 게 현실이었다.  

  한국 리서치 여론속의 여론이 진행한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10명 중 3명이 임신 중이 아님에도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임신하지 않은 사람이 임산부 배려석에 앉을 것을 본 경험은 전체 응답자 중 과반수를 넘겼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힘듦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타인의 배려가 있었다. 다친 다리를 보고 아프겠다고 공감해 주는 아주머니, 사람이 빽빽한 버스에서 좌석에 앉으라고 양보해 주는 중앙대 학우, 교통약자석은 아픈 사람이 앉는 거라며 선뜻 자리를 양보해 주신 할머니. 이런 선의를 받을 때마다 마음은 따뜻해졌다. 다친 다리의 서러움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교통수단에서 양보와 배려는 의무가 아니다. 그저 선택일 뿐이다. 이러한 선의에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봤다. 그리고 물어봤다. 아직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이아린 학생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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