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필자는 외출 시 분신처럼 챙겼던 무선 이어폰을 멀리하는 중입니다. 주변음 차단 기능을 가진 성능 좋은 무선 이어폰을 사놓고 말이죠. ‘대낮 번화가에서 누군가 나를 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처음 가져봤기 때문인데요. 과민반응인가 싶었다가도 ‘대낮’, ‘칼부림’, ‘번화가’ 등 서로 조화되지 않는 단어들이 난무하는 기사 헤드라인을 보며 오늘도 습관적으로 챙긴 무선 이어폰을 가방 속에 그대로 둡니다.

  ‘치안 강국’은 옛말이 다 됐습니다. ‘흉기 난동’, ‘칼부림 예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죠. 지하철 역사부터 학교, 식당 등 장소도 참 다양한데요. 이러한 흉악 범죄가 이어지자. 당정은 가석방 없는 종신형, 즉 ‘절대적 종신형’ 제도 신설을 추진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형법 제72조(가석방의 요건) 제1항에 따라 무기형을 선고받더라도 일정 요건 충족 시 가석방이 가능토록 규정하는 상대적 종신형을 채택 중입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향한 당정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평생 격리되며 다시 신체의 자유를 향유할 기회가 박탈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제도라는 것이 이유였죠. 맞습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합니다. 아무리 흉악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라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존엄한 존재임은 변함이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같은 인간의 존엄함에 순위를 매길 순 없죠. 하지만 반대 단체의 주장에선 이미 침해된 피해자의 존엄성에 대한 고려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의문이 듭니다.

  또 ‘존엄성’이 타인의 존엄성, 나아가 생명을 해칠 권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최근 발생한 한 흉기 난동의 피의자는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진술했죠. 어떤 사회가 존엄성 있는 사회일까요. ‘인간의 존엄성’ 나아가 생명을 앗아간 자에게 ‘합당’하고도 교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사형제에 중하는 처벌을 도입하는 만큼, 앞으로 위헌성을 비롯해 충분한 논의와 신중한 검토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다만 분명 전제할 것은 우리는 ‘존엄한’ 인간이기에 타인의 존엄과 생명을 앗아간 죄의 무게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물어 죽인 짐승에게 반성을 요구하고 교화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존엄한 인간이니까요.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필자는 여전히 그 이념에 동의합니다.

  최근 필자의 일상은 무선 이어폰을 편히 착용하지 못할 정도로 변했습니다. 이 정도만으로는 필자의 존엄성이 침해됐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흉악 범죄의 피해자,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일상은 어떤지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온전히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누군가는 존엄을, 누군가는 생명을 잃었을 수 있겠지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두가 존엄성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요?

안소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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