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브로는 ‘시네마’와 ‘시나브로’를 합친 단어입니다.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극장·예술계는 조금씩 변화의 흐름이 생겨나고 있죠. 이번 주 문화부는 영화계의 정치적 올바름(PC)을 들여다봤습니다. 5월 개봉한 <인어공주>는 국제사회에 ‘영화를 통한 PC의 실현’이라는 화두를 던졌는데요.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엇갈렸죠. 월트 디즈니와 PC의 역사부터 영화에서 비롯된 논쟁의 양상까지, 진정한 PC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노력을 함께 살펴봅시다. 진수민 기자 susky@cauon.net

사진출처 마블 스튜디오

“정치적 올바름(PC)은 문화예술이 혼자 풀어야 할 숙제도, 특정 정치 진영에 남겨진 과업도 아닙니다. 모두가 고민해야 할 ‘우리의 미래’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송희 교수(세종대 문화산업경영 융합전공)-

 

정치적 올바름(PC). 성차별이나 인종차별 등에 근거한 언어 사용 및 활동을 바로 잡으려는 사회적 움직임을 의미한다. 사회 변화를 발 빠르게 읽어내는 미디어계는 이러한 움직임을 기민하게 콘텐츠에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문화콘텐츠에 PC를 입히는 것에 대해 대중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리는 상황이다. 5월 개봉한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는 우리 사회가 PC에 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었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는 적발에 백인으로 묘사된 인어공주를 흑인 배우를 통해 재현한 월트 디즈니, 그 중심에는 PC가 있었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변화하는 사회적 흐름에 발맞추고자 한 월트 디즈니. 한송희 교수(세종대 문화산업경영 융합전공)는 월트 디즈니가 PC를 추구하는 것을 하나의 생존전략으로 바라봤다. “2000년대 초반은 신생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동시에 미국 사회에서 다양성 이슈가 부상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픽사, 드림웍스 같은 새로운 문화기업에 비해 ‘오리지널 프린세스’를 앞세우던 월트 디즈니의 전략은 시의적이지 않았어요. 변화와 쇄신이 절실했던 월트 디즈니에게 PC는 매력적인 대안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콘텐츠 소비 시장의 확대 또한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PC 추구가 기존 관객층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월트 디즈니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입니다. 이제는 백인만이 높은 사회 지위로 진입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이는 소비 주력층이 넓어졌다는 것을 뜻하죠. PC는 이러한 관객층을 포용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월트 디즈니가 제작한 콘텐츠를 보는 사람은 흑인과 백인이 전부가 아니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 성별의 사람이 시청하는 콘텐츠이기에 유색인종과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월트 디즈니의 행보는 반갑게 느껴진다. 월트 디즈니는 자신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누구나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송희 교수는 월트 디즈니의 영화 속 주인공이 가지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과거 극의 중심은 백인 엘리트 남성이었습니다. 반면 유색인종은 야만적인 인물로 그려졌죠. 1990년대 이전의 월트 디즈니는 인종·젠더 차원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했어요. 하지만 200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영웅의 스펙트럼이 백인 남성을 벗어나게 됩니다. 아름다움의 형태도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고 말하죠. 이는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심혜경 교수(한신대 유럽문화영상학과)는 획일적이지 않은 주인공 묘사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재단하지 않도록 만들었다고 전했다. “과거의 디즈니 공주 시리즈를 보고 자란 어린이는 ‘공주인 나는 예쁜 옷을 입고 누워 있으면 왕자가 구해줄 거야’와 같은 수동적 태도를 지니곤 했어요. 그러나 최근 디즈니 공주는 스스로 왕국을 경영할 수도 있고 결혼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 다양한 인종과 성별의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긍정하는 묘사를 새롭게 마주하게 된 거죠.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가는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진 출처 디즈니
사진 출처 디즈니

 

  내가 알던 공주가 아니야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 월트 디즈니지만 정작 일부 관객은 이 취지에 공감하지 못하는 눈치다. ‘정치적 올바름’을 부정하지 않음에도 일부 영화에서 이를 다룰 경우 거부감이 드는 기현상을 우리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마블의 영화 <이터널스>에는 아시아계 영웅인 ‘세르시’, 흑인이자 언어 장애를 지닌 ‘마카리’, 성 소수자 ‘파스토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스프라이트’ 등 다양한 영웅이 등장한다. 캐릭터 각각에 PC 요소를 담은 만큼 개봉 당시부터 ‘스토리와 관계없이 과도하게 PC를 강조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관객들로부터 제기됐다. 인물 설정으로 PC를 강조한 것은 비단 만의 일이 아니다. 


 <인어공주> 속 흑인 인어공주, <피터팬&웬디> 속 흑인 팅커벨 등 월트디즈니는 기존 캐릭터의 외형을 변형하면서까지 유색인종 주인공에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원작 훼손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든 모양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속 에리얼은 빨간 머리를 한 백인이다. 어릴 적부터 인어공주를 보고 자란 이들에게는 흑인 에리얼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유색인종 주인공에 초점을 맞춘 디즈니의 실사 영화 <인어공주>캐스팅은 쏟아지는 비판 속에 국내에서 약 64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정제호 교수(한국교통대 한국어문학과)는 월트 디즈니 캐릭터들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만큼 각인된 기억이 주는 영향이 크다고 설명했다. “해당 캐스팅을 보면 갑작스럽게 대중 앞에 PC가 던져졌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획일화된 공주라는 캐릭터를 봐왔고 그 결과로 대중은 새로운 에리얼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PC 자체가 흥행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아니다. 한송희 교수는 히어로물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선택이 <블랙위도우>나 <블랙팬서>가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두 작품 모두 영웅서사의 골조를 유지하면서 디테일한 부분만 손봤습니다. 마블 팬들에게 ‘주인공이 누구냐’보다 중요한 건 ‘주인공이 원작 세계관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인 거죠.” 


  대중성을 간과할 경우 흥행에 실패한다는 분석도 있다. 김헌식 평론가는 대중문화의 핵심은 대중성이라고 강조하며 이를 확보해 자연스러운 변화를 꾀한 모범 사례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꼽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속 동물과 식물, 여성, 유색인종 등 다양한 인물은 ‘가디언즈’라는 진정한 공동체로 거듭난다. “대중문화인 월트 디즈니가 사회적 가치를 담으려면 우선 대중성을 띠어야 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시각적 매력을 넘어 그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장치나 연출을 시도했어요. <인어공주>에서는 그런 감정적인 연출이 부족했던 것이죠.” 대중성을 확보한 또 다른 사례로 정제호 교수는 마블 속 방위 단체의 국장 ‘닉 퓨리’를 들었다. “현재 닉 퓨리는 흑인인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하고 있지만 본래부터 흑인 캐릭터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현재 이 캐릭터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흑인 국장이 영화와 코믹스에서 인기있는 캐릭터로 자리를 잡았죠. 이같이 자연스러운 변화가 대중이 가장 바라는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수반되지 않을 경우 작품의 성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진성희 교수(숭실대 중어중문학과)는 동양인 영웅을 앞세운 마블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그 사례라고 말했다. “영화의 이야기와 배경을 관객이 자연스럽게 수용하기 위해 제작진은 동양 문화와 정서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양인 영웅이라는 이유로 동양 문화를 드러내야 한다는 점만 의식하다 부자연스러운 서사를 낳게 됐죠. 여러 문화권에서 살아온 관객이 내용을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어요.” 

  올바름을 위한 혜안 모아야 

  
PC를 향한 영화계의 움직임에 비판점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희정 교수(국민대 교양대학)는 현재 월트 디즈니의 행보에 관해 다수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어공주>등 월트 디즈니의 영화는 구색 맞추기 아니냐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PC를 미디어에 담고자 해요. 하지만 이렇게 다양성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 있지 않다면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의 소수자 과소 재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PC를 위한 PC는 대중의 외면을 받아왔다. PC가 영화의 흐름 속에 자연히 스며들게 하기 위한 노력이 급선무인 이유다. 한송희 교수는 오늘날 월트 디즈니에 대한 비판은 본분을 망각한 문화기업을 향한 대중의 불만일 것이라고 전했다. “자연스러운 PC 콘텐츠를 위해 더 정교한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영화계가 선보이는 PC가 과연 그런 부담과 책임을 짊어진 채 세상에 나온 고민의 산물이냐 묻는다면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려워요. 유색인종이나 여성 주인공과 같은 캐릭터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직 의견은 분분하지만 다양한 대중의 반응과 계속되는 논쟁은 영화계를 ‘정치적 올바름’의 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 정제호 교수는 대중의 역할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대중이 개인의 선호와 의견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입을 막으려는 시도들이 문제겠죠. 의견의 대립은 결국 우리를 다양성의 한가운데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대중과 함께 제작자의 고민도 필수적이다. <로마>와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예술가로서 우리의 책임은 다른 이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알폰소 감독의 말을 근거로 제작자가 고민해야 할 지점을 이야기했다. “영화는 상품이나 산업이기도 하지만 공적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성숙에 기여하는 영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고민해야 하죠. 나아가 영화와 창작자들이 공존할 수 있는 영화 생태계 마련에도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선아 여성영화인모임 대표(단국대 연극전공 교수)는 영화 제작 현장에서 관련 노력들이 지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영화 산업의 창작과 재현 모두에서 다양성이 확대될 수 있는 정책을 펴나가야 합니다. 영국 영화 협회는 성별·지역·성 정체성·인종·돌봄 유무·연령 등 창작자 구성의 다양성 기준을 제시하고 있죠. 한국 역시 다양성 가치를 보다 분명하게 내세우고 정책과 산업의 다양한 분야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정치적 올바름’의 길은 대중과 제작자 간의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 나아갈 수 있다. 당장은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현재의 고민과 노력은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현시점의 뜨거운 논쟁이 끝끝내 우리를 ‘정치적 올바름’의 길로 인도해줄 것이라 믿고, 우리는 논쟁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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