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되어 학업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고 심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많아지니 뭔가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에 빠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무수한 공상에 빠지고 뒤따라오는 감정의 요동에 휩쓸린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생각을 할 때면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주제로 삼곤 한다. 왜냐하면 단어로는 쉬운 이 감정이란 친구는 너무 추상적이고, 복합적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일을 그르치게도 만드는 일생의 난제이기 때문이다. 도를 깨우친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우리는 살아가며 신나는 일이 생기면 웃다가도, 화나는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욱하며 소리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이 도깨비 같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짜증나거나 기쁘다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은 결국 말로 한다. 밖으로 뱉지 않는다 뿐이지 마음속에는 항상 지껄이고 있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쟤는 저게 마음에 안 들어.” “기분 나쁘게 생겼다.”... 우리는 이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반응하고 감정을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내 마음속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문제는 삶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 온갖 소동에 있다. 그리고 일단 내 안의 목소리가 있다는 걸 인식한 순간 답을 찾을 수 있다. 돌발적인 그 감정의 목소리를 나와 다른 존재로 대상화하고 경청하며 주인이 되는 것은 어떨까. 일단 내가 그 마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자가 되니 사고의 단계가 하나 더 늘어나고, 브레이크로써 작용하며 감정에 덜 휘둘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소리를 들으며 앞으로의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이미 벌어진 내부의 혼란은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까도 궁금해진다. 이 혼란은 마음에 깊게 박힌 가시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필자의 경우는 여유로움이 가시였다. 여유가 혼란을 준다니 다소 모순적일 수도 있겠지만 늦게 학교에 들어온 나에게 여유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고, 이는 정체를 의미하며 조급한 나에게 혼란과 불안을 주었으니깐. 누구에게나 이렇게 건드리면 혼란을 주는, 아린 가시가 가슴에 박혀있다. 우리는 이 가시를 건드리지 못하게 숨기거나, 혹은 뽑아내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다. 당연히 전자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다. 보호막을 덧대어 아프지 않다 해도 그 가시를 신경 쓰느라 매사 전전긍긍 끌려다니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 보호라는 명목하에 꽁꽁 숨기며 회피하지 말고, 인식한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면 어떨까 싶다. 앞서 말했듯 문제는 삶에 있지 않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으니까 말이다. 

  복잡한 사회만큼이나 마음도 얽히고설켜 나를 잃어버리는 요즘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가시를 뽑아가며 흔들리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영혼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강병연 학생
기계공학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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