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조보를 알리고 조명하는 제5회 국제학술심포지움이 9월에 열린다. 기존 인쇄신문의 역사가 서양의 인쇄술을 중심으로 한 유럽 중심의 관점이었다면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발행한 인쇄 매체 기술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1650년에 발행한 <아이코멘데 차이퉁>이 세계 최초 일간 인쇄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80여 년 앞선 조선에서도 정보 매체를 인쇄해 배포했다는 기록이 여러 사료에 있었으므로 비교될 수 있었으나 실물로 확인되지 못했다. 따라서 2017년 발견된 인쇄 조보는 조선 시대 신문의 형태를 띤 인쇄 매체가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실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여기에 활자조판 방식으로 인쇄하였음이 확인되어 중국의 명나라 목판 인쇄 매체인 저보가 활판 인쇄를 하기 훨씬 전에 조선에서 활자 인쇄 매체가 제작되었음을 내세울 수 있게 됐다. 

  인쇄 조보는 조선왕조 선조 10년인 1577년 8월부터 11월까지 약 3~4개월 동안 발행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발견된 인쇄 조보는 11월 6일, 15일, 19일, 23일, 24일 자로 8쪽에 이른다. 발행날짜로 추정할 때 주간보다 자주 발행했을 가능성이 높고, 23일 자와 24일 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간일 가능성이 높다.  

  밤하늘에 혜성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소 전염병이 확산하고 있고 이로 인해 공사에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는 내용이 인쇄 조보에 실렸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에 관심이 높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조선시대 조보는 정부의 공보 매체 내지 관보였다. 봉건 통치의 보조적 수단으로 기능했다. 정부의 결정이나 지시, 공지사항을 전달했고 당시 핵심 정치사상이었던 유교적 사상을 전파하고 선전하는 수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나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이를 해설하거나 해석해 실었는데, 이를 통해 여론을 계도하는 효과를 기대했음도 짐작된다.  

  제작은 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서 소식을 취사선택하고 산하기관인 기별청에서 발행하는 식이었다. 기별서리들이 필요한 기사를 선별해서 붓으로 따라 썼다. 매일 아침 각 관청은 기별지를 베껴 쓰는 기별서리를 기별청으로 보냈고, 지방에는 조보를 배달하는 기별군사를 두었다. 빠르게 옮겨 적어서 기별체라는 별도의 글씨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한자를 안다는 사대부들도 흘려 쓴 글을 읽기가 쉽지 않았을 듯싶다. 기별청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경복궁이다. 입장권을 확인하는 흥례문을 지나서 근정문에 이르기 전 왼쪽 모서리를 바라보면 기별청이 보인다.  

  반듯한 글자라 읽기 쉽고, 누구나 사서 볼 수 있는 조보가 나왔으니 인쇄 조보 인기가 얼마나 높았을까? 과거나 지금도 새로운 소식은 중요하고, 사람들은 뉴스를 상품으로 거래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뉴스가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할 이유다. 

김수정 강사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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