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문화부는 용맹한 전사, 줄루인을 클릭해 봤습니다. 수천 년 전, 남부 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줄루인은 드넓은 초원을 호령했죠. 줄루인은 19세기 영국의 제국주의 식민지화에 대항해 용맹하게 싸웠지만 결국 식민 지배를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여러 굴곡을 이겨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는데요. 낭만과 흥을 간직한 전통 문화 또한 보존하고 있죠. 전통과 현대의 융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줄루인. 그들의 이야기를 포착해 봤습니다.엄정희 기자 rlight@cauon.net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을 정복했던 용맹한 전사, 줄루인. 그들은 전사의 기개로 단시간의 영광을 일궜지만, 시대의 벽에 부딪혔다. 한때 남아프리카 대륙을 호령했던 그들이 맞이한 운명의 굴곡을 들여다봤다. 

  초원을 호령한 기개 
  줄루인의 맥은 남부 아프리카에 수천 년 전부터 살아온 반투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투족은 짐바브웨와 콩고에 이르는 영토를 아울러 문명국가를 이룩했다. 줄루인은 반투족에 속한 민족으로 그 어떤 이보다도 용맹하게 초원을 호령했다. 줄루 왕국은 사하라 이남에서 한반도 6배 크기의 땅과 백여 개가 넘는 다른 부족을 거느릴 만큼 그 기세가 남달랐다. 

  줄루의 전사들은 영국군과의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전설적 위용을 뽐냈다. 1879년 아프리카 남부 이산들와나 평원을 가득 메운 줄루 전사 2만여 명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1800여 명의 영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해당 전투는 아프리카 원주민 군대가 영국군을 상대로 거둔 역사상 최초의 승리였다. 그들의 승리는 집단 전술과 독자적으로 개량한 무기의 영향이 컸다. 특히 최정예 부대가 적의 측면이나 후방을 기습공격하는 집단 전술 ‘황소의 뿔’이 큰 승리 요인이었다. 

  줄루 왕국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산들와나 전투의 패배를 반면교사로 삼은 영국군은 기관총을 도입해 줄루 왕국을 침공했다. 80여 년이라는 짧고 굵은 역사 동안 초원을 호령했던 줄루인의 전성기는 기약 없는 쉼표를 맺었다. 영국 아래 합병된 줄루 왕국의 땅은 케이프 식민지, 트란스발공화국, 오렌지자치국의 영토와 함께 남아프리카연방으로 묶였다. 남아프리카연방은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1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으로 독립했다. 

1879년 줄루 왕국과 영국 간에 벌어진 이산들와나 전투는 아프리카 군대가 영국군을 이긴 최초의 싸움이다. 줄루인들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의 소수정예병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줄루 왕국의 독보적인 군사체계와 전술 덕분이었다. 사진출처 National Army Museum 
1879년 줄루 왕국과 영국 간에 벌어진 이산들와나 전투는 아프리카 군대가 영국군을 이긴 최초의 싸움이다. 줄루인들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의 소수정예병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줄루 왕국의 독보적인 군사체계와 전술 덕분이었다. 사진출처 National Army Museum 

 

  줄루인이 걸어온 여정 
  줄루인은 남아공에 이주한 백인들이 펼친 인종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또 다른 벽을 마주했다. 당시 백인 정부는 줄루인을 비롯한 원주민을 탄압함으로써 노동력을 확보해 남아공 땅을 채굴하고 제반 공업 시설을 운영했다. 이들은 통행통제법과 원주민토지법을 통해 원주민이 근무하는 광산지의 7%에서만 원주민이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 

  최일성 교수(한서대 자유전공학부)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비인간성을 설명했다. “당시 백인 정부는 원주민의 땅을 의미하는 ‘반투스탄’을 별도 지정하고 원주민에게 정치적 자율성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반투스탄은 자치정부가 들어설 사회적 인프라조차 없는 불모지였죠. 해당 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줄루인을 비롯한 원주민에게 형식적인 자치를 허락해 국제적 비난은 모면하면서도 그들을 불모지에 고립시킴으로써 백인에게 더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극단으로 치솟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1990년 공식 철폐됐다. 20세기 말까지 인종분리 정책을 고수해 온 남아공이었지만 국제사회의 압박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줄루인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함께 1994년 줄루 사회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일어났다. 당시 남아공의 통일을 주장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줄루인의 독립을 위했던 인카타자유당(IFP)은 오래전부터 대립해 왔었다. 결국 IFP를 지지하는 줄루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단행했고 그 결과 ANC 지지자들과 맞붙어 많은 사상자를 냈다. 

  통일 혹은 독립을 둘러싼 줄루인과 남아공 정부의 대립은 넬슨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중재됐다. 김광수 교수(한국외대 아프리카학부)는 이러한 화해와 통일에는 ANC의 노선 우회와 넬슨 만델라의 영향이 컸다고 밝혔다. “당시 줄루인은 동일 민족 출신인 망고수투 가챠 부텔리지를 대통령으로 옹립하고자 했는데요. 이러한 줄루인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고 대립의 형국을 바꾼 존재는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그는 당해 흑인 참여 자유 총선거에서 당선된 후 ANC를 남아공 내 유색인종 전체를 위한 정당으로 만들었고 줄루인 출신 인물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죠. 이러한 정책이 줄루 사회가 남아공과 원만한 통일을 이루는 데 일조했습니다.” 

  현대를 만난 줄루인의 왕좌 
  과거 화려한 영광으로 완전한 전위를 일으킬 순 없지만 줄루인의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남아공 내의 일부 부족은 현대화로 전통이 퇴색되고 소수 집단으로 전락했지만, 줄루인은 21세기에도 전통을 계승하면서 남아공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장용규 교수(한국외대 아프리카학부)는 이러한 융화에는 줄루인이 남아공 역사에서 갖는 위상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밝혔다. “줄루 사회는 남아공 내의 최대 단일 민족 집단입니다. 그들은 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했던 왕국을 형성했던 역사를 지니기에 남아공 정부 또한 줄루인의 전통을 무시할 수 없죠. 줄루인 또한 자신들의 남아공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지니기에 남아공 정부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줄루의 왕은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집단의 수장으로서 전통 관습과 현대 민주주의를 이어준다. 특히나 지역 범죄 퇴치나 질병 예방정책 시행을 위한 남아공 정부의 노력은 줄루의 왕을 비롯한 전통 지도자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직 남아공 내에는 국민으로서의 개인보다 자신의 민족 내에서의 삶에 집중하는 원주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아공 정부는 더 많은 지역에서 인체 면역결핍 바이러스(HIV)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줄루의 왕과 함께 협력하기도 했다.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던 줄루인은 침략과 차별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저만의 외침을 지속해 왔다. 비록 줄루 왕국의 전성기는 과거에 머물렀지만, 용맹했던 그들의 대체 불가능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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