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비평 부문 당선: 강유나 학생(문예창작전공 2) <수많은 세계를 지나 우리에게로>

해당 영상비평은 다니엘 콴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다룹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수많은 우주 속 존재하는 ‘우리’는 친절이라는 맺음으로 연결돼 있음을 전한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수많은 우주 속 존재하는 ‘우리’는 친절이라는 맺음으로 연결돼 있음을 전한다. 사진출처 다음 영화

-1. 모든 것을 활용해 일어나는 갈등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총 3부로 나뉘어 영화를 전개해 나간다. 긴 제목을 해체해 1부 ‘Everything', 2부 ’Everywhere', 마지막으로 3부 ‘All at once’로 부를 나눴다. 영화의 전개 안에서 ‘에블린’의 우주를 분리했듯 영화를 감싸고 있는 부도 세 개로 쪼개진다. 그로써 우리는 한 단어, 하나의 부 안에서 수많은 우주를 마주하게 된다.

1부인 'Everything'은 제목을 직역하듯 ‘모든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은 주인공인 에블린이 살아가는 세계가 여러 우주에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즉, 이 영화는 먼저 관객에게 ‘멀티 유니버스’를 보여줘야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에블린은 ‘이 세계’의 에블린이다. 여기서 에블린은 동성 애인을 사귀는 딸의 엄마이자, 남편과 함께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이며, 오늘 해야 할 신년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일이 많아 남편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다. 남편이 이혼 신청서를 가져와 대화할 시간이 있는지를 묻지만, 신청서의 내용을 확인할 시간도 없이 시간은 바쁘게 흘러간다. 여기까지는 부산스럽지만 평이하고, 하나의 공간만이 등장한다. 세탁소의 CCTV에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남편의 모습이 잡히기도 하지만 에블린이 손님의 세탁물을 찾아 나왔을 때 남편은 언제나 그랬듯 손님과 춤이나 추고 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에블린보다 먼저 관객에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여지를 남겨준다.

이 이상함은 세무조사를 하러 갔을 때 설명된다. 엘리베이터에서 남편은 갑자기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로 바뀌어 에블린에게 알 수 없는 매뉴얼을 말해준다. 매뉴얼을 따르자 에블린은 ‘다른 세계의 에블린’으로써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인물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서의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그저 동료인 웨이먼드이며, 세무조사 직원은 갑자기 에블린을 죽이려 든다. 독특한 점은 엑스트라만이 ‘악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악인들을 조종하고 에블린을 찾아다니는 ‘최종 빌런’인 조부 투파키가 여기서는 에블린의 딸인 ‘조이’라는 점이다. 혼란에 빠진 에블린에게 남편의 얼굴을 한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의 멀티 유니버스’에 대해 말해준다. 여러 우주에 수많은 네가 있고, 어떤 방식을 통해 다른 세계의 에블린과 연결될 수 있다고. 그리고 네가 이 모든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는 어떤 특별한 능력도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던 에블린은 다른 우주의 에블린의 무술 능력을 빌려와 자신들을 체포하러 온 경찰관을 물리친다. 딸인 조이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딸이 아닌 ‘조부 투파키’와 독대하기도 한다. 여러 우주에서 에블린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딸의 동성 애인을 아버지에게 감추려다 딸과 싸우고, 세탁소 일도 잘 되지 않는 ‘이 세계의 에블린’은 액션 배우로써 성공한 화려한 에블린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녀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웨이먼드는 다른 세계의 에블린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조부 투파키의 기원이 ‘다른 세계의 에블린이 조이를 한계로 밀어붙였기 때문’인 데에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만든 ‘에브리씽 베이글’을 보여준다. 다른 세계의 에블린이 다른 세계의 조이를 파괴하고, 그로써 탄생한 조부 투파키가 만든 베이글은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블랙홀이다. 쏟아지는 설정과 수많은 우주 속에서 이를 이해해야 하는 건 에블린만이 아니라 관객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1부 동안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보며 에블린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2부는 신년 파티가 열리는 ‘이 세계’를 비롯해 ‘모든 곳’을 넘나드는 에블린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에게 에브리씽 베이글은 ‘모든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함께 손을 잡고 블랙홀에 들어가 줄 ‘에블린’을 찾기 위해 수많은 에블린을 죽이고 다녔다는 것이다. 에블린은 이 말에 설득되고, 조부가 그랬듯 우주를 넘나들며 다른 인물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너구리를 모자에 숨겨놓고 요리하던 요리사의 너구리를 손님들에게 들키게 만들고, 액션 배우인 에블린으로 빙의해서는 그곳의 웨이먼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세계’로 돌아와서는 세금을 신고하지 않은 에블린을 찾아온 직원 디어드리에게 난동을 부린다. ‘다른 세계’의 에블린이 ‘다른 세계’의 조이를 파괴했다면, ‘이 세계’의 에블린은 조이와 함께 블랙홀로 들어가는 결말을 향해가며 ‘모든 세계’를 파괴한다. 에블린은 모든 우주에 ‘버스 점프’를 하다 쓰러지고, 고요한 ‘돌’의 세계에서 ‘돌’이 된 조부 투파키를 마주한다. 어떤 음향도, 소리도 없지만, 관객은 돌이 된 둘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혼란과 혼돈 속에서 고요함은 커다란 힘을 가진다. 고요하고 적막한 그 세계에서, 둘은 같은 ‘돌’이 되어 대화한다.

자연스레 우리는 ‘조부 투파키’, 즉 다중우주의 조이를 따라 에블린이 블랙홀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조이가 에블린의 딸인 것처럼, 이혼 신청서를 건넬 정도로 에블린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던 웨이먼드 또한 에블린의 남편이자 가족이다. 여기서 이 둘을 막아서는 건 웨이먼드다. 그는 디어드리를 설득하고, 에블린을 죽이려 하는 다른 인물들을 막아서고, 블랙홀로 들어가기 직전의 에블린을 막아선다. 조부 투파키가 잡지 않은 맞은편 손을 잡고,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설득한다.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공격하지도, 상처를 주고 끌고 오지도 않았지만, 에블린은 자신을 위한 웨이먼드의 설득에 정신을 차리게 된다.

돌아온 에블린을 두고 조부 투파키는 홀로 블랙홀로 걸어 들어간다. 그를 막기 위해 여러 엑스트라들을 공격하는 에블린에게, 웨이먼드는 ‘친절함’을 보여 달라고 말한다. 1부와 2부의 초반부에서 에블린이 다른 사람들을 물리치는 방법으로 ‘무술’이나 ‘공격’을 선택했다면, 여기서 에블린은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완성’하거나 함께해주는 방식으로 그들의 공격력을 약화시킨다. 조이를 공격하라고 말하고 에블린과 싸우려 들던 ‘다른 차원의 아버지’가 에블린을 공격하려 들자, 에블린은 자신은 아버지처럼 자식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세계’로 돌아온다. 에블린은 1부에서 그랬듯 조이의 동성 애인인 베키의 손을 잡지만, 이제 에블린에게 베키는 ‘숨겨야 할’ 사람이 아니다.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당당히 베키를 ‘딸의 애인’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이 세계’의 조이는 여전히 차를 타고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차에 타려는 조이를 붙잡고 말한다. ‘난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어디든 갈 수 있는데도 여기에 남아있는 이유. ‘상식이 통하는 건 한 줌의 시간’뿐인 이곳에 머무르기로 선택한 이유. 여기서는 ‘우리’가 가족으로써 온전한 ‘우리’일 수 있고, 어떤 모습이든 조이가 ‘딸’이기 때문이다. 조이와 에블린은 서로를 끌어안고, 영화는 3부로 나아간다.

3부에서 셋은 ‘우리’가 되어 세무조사를 받으러 간다. 에블린은 여러 세계의 일들을 체험하고, 어떤 모습이든 결국 ‘에블린’인 이들을 마주한 뒤, ‘이 세계의 에블린’으로 돌아온다. 3부가 끝나면 소제목으로 해체되어 있던 제목은 하나의 커다란 제목에 도달한다. ‘모든 것, 모든 곳’을 보고, 비로소 ‘한꺼번에, 즉 ’하나‘가 되는 것이다.

-2. 하나로 만드는 힘

영화의 1부에서부터 대두되는 설정은 ‘멀티 유니버스’다. 이는 다중 우주론과 평행우주의 개념을 혼합한 것으로, 우리가 사는 우주 말고 또 다른 우주가 여럿 존재하며 다른 우주의 인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설정이다. 이 영화에서 멀티버스를 나누는 기준은 살아오면서 해당 인물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다. 주인공인 에블린이 부모님의 결혼 반대에 그대로 웨이먼드와 헤어졌다면? 무술을 배웠다면? 선택하지 않아서 마주하지 못했던 결과들이 이곳 너머의 또 다른 우주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에블린은 현재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화려한 액션 배우인 다중우주 속 자신의 모습에 저 우주의 에블린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능력이 있는 다른 에블린과 자신을 비교하며 ‘실패한 에블린’인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에블린이 저쪽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지 않고, 조이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각자의 삶을 분리시키도록 방치해두지도 않는다. 멀티버스의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설정 아래 에블린과 또 다른 에블린은 능력을 공유하거나 서로 빙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기본적’인 설정이자 표면적인 갈등 해결 방식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중요한 지점은 갈등을 주인공이 어떻게 내면에서 소화하고 받아들이는지에 있다. 우리는 주인공의 내면 변화 과정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모든 ‘또 다른 세계’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이 세계의 에블린’을 위해 펼쳐진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를 ‘우리’로써 있게 하는, 그리고 모든 걸 버리고도 얻고자 하는 그 관계에 대한 힘이다.

사실 ‘현실’의 이야기만 보던 우리에게 여러 설정은 다소 당황스럽게 다가온다. 거대한 검은 베이글, 화려한 분장을 한 딸, 핫도그 손가락을 한 엄마…. ‘엄마와 딸’을 다루면서 이렇게 소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영화가 또 있을까. 딸의 얼굴을 했지만 딸이 아니라는 설정, 그리고 손을 잡고 한다는 이야기가 ‘베이글 안으로 함께 들어가자’라니. 그러나 이 영화가 혼란스러우면서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은 이들이 각자의 세계로 흩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설정이나 사용하는 공간, 차원이 많은 만큼 이 영화는 중심을 잡아줄 하나의 메시지를 단단하게 설정했다. ‘그 모든 삶을, 그 모든 세계를 버리고도 너와 함께’를 전달하기 위해. 이 세계에서만 ‘우리’일 수 있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영화는 다소 긴 러닝타임 동안 이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부를 나누어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1부와 2부의 대비되는 지점들을 비교해가며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에블린을 중심으로 보자면, 1부에서 에블린은 영어와 광둥어를 모두 사용한다. 딸과 소통할 때나 타인과 이야기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남편인 웨이먼드와 대화할 때는 광둥어와 영어를 혼재해 사용한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웨이먼드가 광둥어를 사용할 때는 에블린이 영어를, 에블린이 영어를 사용할 때에는 웨이먼드가 광둥어를 사용해 대답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자연스레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도록 만든다. 분명 함께하고 싶었던 과거가 있고, 세대가 같으며, 큰 갈등의 지점이 없는데도 이들의 대화는 단절된다. 이는 세무서에서 둘이 이혼신청서를 꺼내들고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미지로 구현된다. 한 장의 서류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다. 앞면에는 이혼신청서의 양식이, 뒷면에는 ‘다른 세계의 웨이먼드’가 적어준 ‘버스 이동 매뉴얼’이 있다. 남편인 웨이먼드와 에블린은 한 장의 서류를 사이에 두고 각자 다른 면을 보고 대화한다. 주어를 빼고 묻고 답하는 장면은 얼핏 보면 대화가 이어지는 것도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주제와 다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2부에서 웨이먼드와 에블린은 같은 언어로,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1부에서 서로 대화하지 못하고 부딪히거나 상처를 줬다면, 2부에서는 화해하고,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 다시 떠올려보게 된다.

이는 딸인 조이와도 마찬가지다. 조이와 에블린 사이에는 ‘세대’의 문제가 있다. 조이가 동성 애인을 꽤 오래 사귀었는데도 불구하고 에블린이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친한 친구’로 소개하는 것 또한 ‘세대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에블린은 ‘아버지가 충격받으실까 봐 그런다’고 변명했지만, 베키를 온전히 조이의 애인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 되기도 한다. 2부에서 조부 투파키를 마주한 뒤, 에블린은 조부에게 자신의 딸이 동성 애인을 사귀는 것도 너 때문이냐고 묻는다. 이에 조부 투파키는 ‘아직도’ 자신의 성지향성을 인정하지 못했냐며 비웃는다. 딸 세대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소수자의 지향성이나 문제에 다소 개방적이지만, 에블린이나 에블린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윗세대는 그 고정적인 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2부에서 에블린이 아버지에게 베키를 ‘딸의 애인’으로 당당하게 설명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이 문제 또한 서로를 이해하며 해소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딸의 입장에 서서 엄마를 설득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해 부딪히는 ‘모녀 갈등’을 다룬 영화는 많다. 그런 영화들은 대개 고지식한 엄마 세대에게 자유나 독립을 이야기하는 딸 세대의 구도를 이룬다. 한 세대가 살아오며 이룬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그런 갈등을 다룬 영화들은 대개 갈등 해소를 다른 인물의 대사나 어린 시절 회상을 통해 풀어나가려 한다. 엄마와 딸은 하나의 문제를 두고 자주 부딪히고, 감정을 소모한다. 그 영화들의 한계는 공간이 ‘이 세계’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갈등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사건이나 인물을 그 현실 위에 세울 수 있어야만 한다. ‘엄마’와 ‘딸’은 아무리 미워도 가족이고, 아무리 싫어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 아래 타협과 수용을 거치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끈을 끊어내는 결말로 나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전개 과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라 이입할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게 과연 ‘진정한 수용’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그래, 뭐 어쩌겠니.’ 식의 수용이 우리를 정말 ‘우리’로 묶을 수 있을까? 오히려 답답하게 옭아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지점에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SF 장르를 도입해 여러 상상이나 인물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가진다. 이곳에서 ‘엄마’의 입장에 서 있는 에블린은 여러 우주를 겪으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로 나아간 또 다른 에블린을 마주한다. 화려한 액션배우, 철판요리를 하는 요리사…. 눈에 띄는 점은 이곳에서 조이의 동성 애인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에블린이, 또 다른 우주에서는 동성 애인과 동거 중인 설정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곳의 에블린은 손가락이 핫도그처럼 길고 힘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다중 우주의 에블린들보다 제일 비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이 세계’에서 에블린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문제가 그의 고정관념 안에서는 얼마나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 에블린이 지닌 ‘핫도그 손가락’은 이곳의 에블린이 조부에 대적하기 위해 빙의했을 때는 쓸모가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우주’, 다시 말해 그곳의 시간을 살아갈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곳의 에블린은 힘없고 긴 손가락 대신 발가락을 사용해 피아노 연주를 하고, 애인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거나 현실과 멀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일상이고 삶이다. 영화는 조이와 에블린의 문제를 ‘이 세계’의 대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멀티 유니버스를 통해 이미지로 보여주고, 구도를 전환하기도 한다.

낯선 모습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우주를 겪고 조부의 대사를 들으면서 에블린은 조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조이가 원했던 ‘애인을 애인으로써 소개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떠나려는 조이를 붙잡고 말한다. 화려한 액션배우인 우주, 완벽하지 않은 딸이 딸이 아닌 우주, 그리고 나아가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딸의 애인을 부정적으로 봤던 고정적인 틀까지.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이로써 이들은 온전하게 서로를 수용하게 된다.

-3. 멀티 유니버스 속에서 선택하는 하나의 우주

에블린이 물리쳐야 하는 ‘다른 세계의 조이’, 즉 ‘조부 투파키’의 힘은 막강하다. 무술을 할 줄 아는 에블린도 쉽게 물리칠 수 없다. 웨이먼드는 이곳의 에블린이 모든 세계의 에블린을, 이 멀티 유니버스를 구할 수 있는 이유가 ‘이 세계의 에블린은 모든 면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설적으로, 모든 면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아직 뭐든 될 수 있다고. 이 세계의 에블린이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에블린들이 성공에 머무를 수 있었고, 이곳의 에블린에게는 아직 ‘성공’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그러나 ‘이 세계의 에블린’에게도 하나의 힘이 있다. 이 세계의 에블린이 모든 세계의 에블린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조이’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보다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다정함’이다. 에블린은 ‘모자란 딸’이 ‘딸’이 아닌 우주가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조이를 붙잡고, 베이글의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려는 조부 투파키를 붙잡는다. 그를 통해 에블린은 자신의 세계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멀티 유니버스의 여러 세계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조이의 세계까지도 구해낸다.

영화는 초반부에서 이 둘을 각자의 세계로 분리시켜 놓았다. 공간적 면에서 에블린은 본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고, 조이는 다른 집에서 애인과 살고 있다. 정신적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가치관은 세대 갈등이나 동성 애인 문제의 면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멀티 유니버스’를 거치고 나서, 그리고 에블린이 자신과 조이의 세계를 구하고 나서, 이 둘이 서 있는 공간은 비로소 ‘우리’의 세계가 된다.

에블린이 주인공이고 조이가 최종 빌런이기 때문에 둘의 대립 구도가 화합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뤘지만, 이 영화가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인 웨이먼드 또한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역할을 잡아준다는 점에서도 눈에 띈다. 초반부에서 조이와 에블린 사이에 제시된 갈등 말고도, 웨이먼드와 에블린 사이에도 ‘이혼 신청서’를 중심으로 한 갈등이 하나 존재한다.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에블린이 일에 바빠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에 이혼 신청서를 가져온다.

하지만 영화는 이 신청서를 수리하고 ‘각자의 세계’를 찾아 다른 길로 나서는 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형태로써 이 둘을 연결시킨다. 에블린이 빌런에 맞서 싸우기 버거워할 때, 조부 투파키를 따라가려고 할 때, 자신의 아버지와 부딪힐 때, 세금을 내지 않아 직원이 찾아왔을 때…. 수많은 순간에서 웨이먼드는 주인공인 에블린의 ‘조력자’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낸다. 이곳에서는 남편으로써, 저곳에서는 동료로써. 멀티 유니버스 속에서 계속해서 에블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웨이먼드는 에블린의 세계를 뒤바꿀 수 있다. 영화는 이 지점을 활용해 웨이먼드에게 이 멀티 유니버스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인 에블린을 끌어올리고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래서 세계관을 설명하는 1부에서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멀티 유니버스’라는 설정을 제시하며 공간적인 면에서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4. 수많은 세계를 지나 ‘우리’에게로

그러나 에블린에게 주어지는 변화는 공간적인 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1부와 2부는 비슷한 인물들, 또는 비슷한 장면을 정반대의 구도나 시선에서 보여줌으로써 각 부를 비교해왔다. 마찬가지로, 2부에서는 변화가 그치고 그를 수용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면에서의 ‘변화’를 제시했다. 2부에서 웨이먼드는 조부 투파키를 붙잡기 위해 엑스트라들을 공격하는 에블린에게, ‘친절함’을 보여주라고 말한다.

언급했듯이, 에블린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마음’에 있다. 다른 에블린에게 무술 능력을 빌려온다고 해서 조부 투파키를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다른 에블린이 아니라 이 세계의 에블린이 웨이먼드에게 선택받은 이유다. 에블린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파괴한 여러 우주를 찾아가 다시 그들을 연결시켜주고, 자신을 막아서는 엑스트라들을 ‘친절하게’ 대하며 감정적인 면에서 공격성을 없애도록 만든다. 다소 직접적인 대사처럼 느껴질 수는 있지만, 웨이먼드의 도움이 에블린을 ‘실패’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게 만든 건 분명하다. 이로써 이 가족은 서로를 끌어안고 온전히 ‘우리’가 되어 3부로 나아간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원래 본편만 존재하는 영화의 뒤에 촬영 과정에서 기록된 NG 장면들을 모아 붙여두었다. 이 NG 장면들은 본편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서야 뒤늦게 등장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리는 그 영상을 보면서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왜일까. 왜 우리는 에블린의 탈을 벗은 양자경에게서 영화의 연장선을 찾게 될까. 이는 본편에서 여러 세계의, 여러 모습의 에블린을 봤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에블린은 배우 양자경으로 활동하고 있는 에블린이다. 여기서 에블린과 조이는 동료 관계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영화의 내용에서, 영화를 촬영한 배우에게서, 그리고 영화관을 나와 마주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우리는 또 다른 ‘에블린’을 찾아낸다. 그로써 여러 세계를 지나, ‘에블린’일지도 모를 엄마와, 어느 곳에서는 ‘조이’라는 이름을 가졌을지도 모를 ‘나’의 모습으로써 현실의 우리를 마주한다.

수많은 세계를 지나 ‘우리’에게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그 긴 여정의 종착점, 우리의 차원을 위해 그렇게 서사를 쌓아왔다. 우리는 이 우주의 등장인물로써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누군가는 현재에 만족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곳의 ‘나’를 버거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딘가의 ‘나’는 이곳의 ‘나’를 필요로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삶이 실패한 삶인지, 여기가 어떤 세계인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아직 버티고 나아갈 수 있는, 그리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고 나아가며 모두를 가족으로써 끌어안았던 에블린처럼.

영상비평 당선자 강유나 학생 Interview: 친절함이 세상을 구할 때까지

사진제공 강유나
사진제공 강유나

우리가 여전히 ‘우리’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지만 그중 하나는 확실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무수한 시공간 속 무수한 존재들이 ‘친절함’으로 ‘우리’를 만들어 낸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강유나 학생(문예창작전공 2)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공모전 당선 소감이 궁금하다. 

“최근 ‘글’에 대한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그런 고민을 하면서 걷던 도중 당선 소식을 접하게 됐는데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 조금 홀가분해졌습니다. 누군가에게 제 글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요. 영화가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주듯, 당선 소식도 제가 현실을 버텨내는 사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해 줬습니다. 얼마나 힘들든, 어떤 장르의 글을 선택하게 되든 더 오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비평하게 된 계기는. 

“개봉 당시 영화가 혼란스럽다는 평을 듣고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온 친구가 영화를 보며 제가 떠올랐다고 말해줘서 호기심에 보게 됐죠. 영화의 주제가 인상 깊어 공모전 소식을 듣자마자 해당 영화가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혼란스럽고 당황스럽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 영화에 대한 제 생각을 한번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에블린’이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해석이 흥미로웠다. 

“자신에게 특별한 힘이 없다고 하는 에블린에게 웨이먼드는 ‘실패한 에블린이 있기에 다른 세계에 성공한 에블린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해요. 실패한 에블린은 무엇도 성공하지 않았기에 다른 세계의 ‘악’인 조이(또는 조부 투파키)를 물리칠 수 있다고요. 저는 ‘실패’가 ‘아무것도 이루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지만, 영화 끝자락엔 무엇인가 이룬 에블린을 보면서요.”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궁금하다. 

“에블린과 조이가 ‘돌’인 세계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가장 좋았습니다. 앞선 세계는 요란하게 표현된 것과 대비되게 ‘돌’인 세계는 ‘정말 정적이다’ 싶을 만큼 고요한데요. 돌이니까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조이(또는 조부 투파키)가 말하는데, 에블린은 그 말에 멈추지 않죠. 오히려 규칙 따위는 없다고, 너에게 갈 것이라고 대답하며 움직여요. 온전한 ‘무’의 세계에서도 다가가고자 했던 에블린의 마음이 더 진심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 

“영화 끝자락에서 에블린이 조이를 끌어안는 장면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모두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세계가 어긋나 있을 때도 있고, 그 어긋난 조각을 맞추지 못해 서로를 공격하게 될 때도 있고…. 그럼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죠. 우리는 앞에 놓인 문제에 집중하느라 서로를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이따금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모두를 잊더라도 성공한 세계로 가고 싶을 때도 있죠. 하지만 우리가 ‘우리’로 존재하는 이 세계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비평문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우리는 종종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릴 때가 있죠.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자신만이 지닌 힘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어요. 친절함일 수도 있고, 다른 힘일 수도 있겠죠. 중요한 건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다정해지자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를 잃지 말자는 것. 그런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심사평

박명진 교수(국어국문학과): 환상과 실재의 변증법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상상계-상징계-실재계’라는 개념으로 인간 주체의 존재 방식에 대해 논한 바 있다. 범박하게 이해하자면, 그의 소위 ‘상징계’는 우리의 현실 세계로, ‘실재계’는 상징계의 균열이나 틈을 통해 예고 없이 틈입하는 ‘그것(it)’의 세계라 할 만하다. 

  강유나가 분석한 영화는 라캉이 위에서 말한 3개의 위상학적 의미를 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현실이란 오인(誤認)에 기초해 구축된 환상에 다름 아니라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낯선 실재가 환상의 커튼을 젖히고 불쑥불쑥 뛰쳐나온다고 주장했던 라캉의 아이디어는 이 영화의 상상력과 흡사하다. 라캉과 지젝이 ‘환상 관통하기’를 통해 윤리성이 획득될 수 있다고 했을 때, 영화는 이들의 주장을 영화적으로 번역하려고 시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강유나의 글은 비록 이들의 논의를 참조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글은 영화에 내재하고 있는 상징계 속의 환상 작업과 이 상징계 속으로 끊임없이 출몰하는 실재계의 흔적을 시사하고 있다. 비루한 현실은 그럴듯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곤 한다. 동시에 상상이 현실을 반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영화와 평론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성찰하게 유도한다. 

  좋은 평론은 분석 대상 텍스트를 풍요롭게 만드는 글이다. 강유나의 글은 텍스트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영화적 장치의 의미와 메시지를 정확하게 짚어냄으로써 해당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글을 읽는 재미도 선사한다. 강유나의 평론을 당선으로 결정했다. 건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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