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avant-garde)는 혁신을 외쳤던 예술 사조를 일컫는 말이다. 아방가르드는 18세기 전쟁터의 전위병을 뜻하는 프랑스의 군사 용어에서 출발한다. 혁신과 저항의 정신을 기저로 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은 한국에서도 꾸준하게 전위(煎衛)의 외침을 고하고 있다. 

  화폭에 일어난 예술의 혁명 
  아방가르드 예술은 관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한다. 먼저 예술의 세계관에 한해 아방가르드는 기성 예술의 관념에서 탈피한 실험적이고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뜻한다. 유럽에서 일어났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와 같이 새로운 형식의 예술 운동들을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회적 맥락에서 규명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단순히 예술의 형식을 넘어 당대의 사회현실에 저항 의식을 내비친다. 이러한 의미의 아방가르드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시대와 사투를 벌였던 예술가의 작품에 여실히 나타난다. 20세기 초 소련에서는 예술가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하는 사실주의 미술을 강요했다. 그에 맞서 칸단스키와 말레비치와 같은 예술가들은 예술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절대주의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기존 체제에 대한 전복 의지를 표했다. 이러한 예술적 흐름이 사회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맥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서구와 러시아를 넘어 한국의 예술사 한복판에서도 고유한 맥을 이어왔다.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은 20세기 초중반 김환기, 유영국과 같은 한국 추상회화 선구자들의 등장과 함께 발전했다. 김환기는 기존 한국 회화의 전통 기법에서 벗어나 서구의 표현주의 기법을 도입해 추상 미술을 선보였다.  

  또 다른 아방가르드 화가인 유영국의 추상화 또한 저만의 아방가르드적 특색을 여실히 발한다. 유영국은 초기 작품에서부터 기하학적 구성에 산과 바다의 이미지를 오버랩한다. 이러한 유영국의 일관된 화풍은 선과 면, 색 등의 기본 조형 요소를 통해 보편적인 자연의 본질을 추구하려 했던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유영국은 모더니즘 추상화에 한국의 자연물을 녹여냈다. 그는 색과 면의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묘사하고자 했다.  사진출처 갤러리 아트리에 홈페이지
유영국은 모더니즘 추상화에 한국의 자연물을 녹여냈다. 그는 색과 면의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통해 자연의 본질을 묘사하고자 했다.  사진출처 갤러리 아트리에 홈페이지

  심영옥 교수(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는 유영국의 추상화에 녹아든 아방가르드적 속성에 관해 설명했다. “유영국의 추상화는 자연의 형태를 선과 면으로 도식화하고 대담하게 원색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한국미술과 확연한 차이를 띠죠. 원색적이고 짙은 색조로써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섬광처럼 뻗어나가는 직선을 통해 기하학적인 추상을 그려내는 것 역시 유영국 작품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유영국 작품 속 요소들은 모두 실험적이고 비전통적인 작업을 키워드로 하는 아방가르드적 속성에 해당하죠.” 

  이어 심영옥 교수는 추상미술이 주도한 초기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은 결코 서구의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만의 미학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유영국은 추상미술을 통해 당시 한국에서 새롭고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을 선보인 인물입니다. 그의 추상회화는 서구 추상화의 색상대비 효과와 비교하여 확연한 차이를 지니는데요. 서구 예술의 새로운 형식을 활용하는 동시에 한국적인 미학을 여실히 빛내고 있죠. 서구의 색감과 차별화되게 유영국이 자연물을 조형적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한 원색적 색면이 한국 전통의 오방색을 연상케 하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태동을 이끈 추상미술의 조류는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장악할 정도로 유행했다. 이후 한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은 화폭의 추상미술을 넘어 새로운 노선으로 혁명의 목소리를 더욱 키워나갔다. 

  거세진 혁명의 불씨 
  아방가르드 예술은 단순 예술을 넘어 사회현실과 함께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는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적 감성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 시기였다. 정치사회에서의 격변이 불며 사회 곳곳에서 들린 저항과 혁명의 목소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해당 시기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화폭을 넘어 자신의 몸을 예술의 매개로 삼기 시작했다. 

  김승호 교수(동아대 현대미술학과)는 당시 한국의 정치적 격동기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본격적인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은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5·18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깨어났습니다. 당시 전위적인 예술 운동은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내포하는데요. 하나는 사회정치에 대한 저항에 해당합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속 정치적인 파시즘과 독재의 태동은 예술계가 현실을 지각하게 했을뿐더러 저항에 눈을 뜨게 했죠. 또 다른 차원은 예술에 권위를 입히고 그를 규정했던 기성 논리인 예술지상주의에 저항했다는 점입니다. 5·18민주화 운동 이후 예술에 퍼진 자율성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예술지상주의를 비판하도록 했습니다.” 

  사회와 결부된 아방가르드 예술은 다양한 형식을 통해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냈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행위예술 <한강변의 타살>(1968)은 타성에 젖어 그릇된 행태를 보이고 있던 기성 예술계를 겨냥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이들은 양화대교 아래 파놓은 무덤 같은 구덩이에 ‘문화사기꾼’, ‘문화부정축재자’와 같은 문구를 적은 천을 목에 걸고 스스로 구덩이에 들어간다. 목만 내놓은 그들을 향해 관람객들은 물을 붓는다. 구덩이에서 나온 작가들은 비닐천에 적힌 문구를 읽은 뒤 천을 태워버리는 화형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해당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전했다. “<한강변의 타살>은 국전의 여러 비리와 부정을 발단으로 창작돼 기성 예술가들의 ‘짜고 치는 판’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이들은 직접 구덩이에 파묻혀 타살당하는 듯한 행위를 연출하는 등 몸을 직접적인 표현 매체로 사용하는데요. 이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 귀족들에 대한 작가들의 경고를 더욱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한강변의 타살‘(1968)은 국내 첫 집단 행위예술 작품이다. 세 명의 작가들은 양화대교 아래 구덩이에 묻혀있다가 물세례를 받고 땅 위로 다시 올라온다. 이후 ‘문화사기꾼’ 등의 문구를 적은 비닐을 태우는 화형식을 행한다. 이는 당시 한국의 구태의연한 기성 문화세력을 ‘타살’해야 함을 주장한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사진출처 KIAF 블로그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한강변의 타살‘(1968)은 국내 첫 집단 행위예술 작품이다. 세 명의 작가들은 양화대교 아래 구덩이에 묻혀있다가 물세례를 받고 땅 위로 다시 올라온다. 이후 ‘문화사기꾼’ 등의 문구를 적은 비닐을 태우는 화형식을 행한다. 이는 당시 한국의 구태의연한 기성 문화세력을 ‘타살’해야 함을 주장한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사진출처 KIAF 블로그

  성능경의 <신문읽기>(1976) 역시 권력과 기성 화단에 대한 변화를 모색했던 아방가르드 작품이다. <신문읽기>는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의 신문을 면도날로 오리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언론 탄압이 지속됐던 유신시대에 대한 저항 정신을 표출했다. 이는 기존의 예술 형식에서 탈피한 퍼포먼스라는 점에서 예술 자체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속성을 지닌다고도 볼 수 있다. 

성능경의 ’신문읽기‘(1976)는 언론 검열이 극심했던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풍자하는 아방가르드 작품이다. 작가는 전시 동안 발행된 신문 기사들을 읽은 후 이를 면도날로 도려내는 행위를 통해 진실을 허구화했던 세태를 비판한다. 사진출처 리안갤러리 홈페이지
성능경의 ’신문읽기‘(1976)는 언론 검열이 극심했던 197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풍자하는 아방가르드 작품이다. 작가는 전시 동안 발행된 신문 기사들을 읽은 후 이를 면도날로 도려내는 행위를 통해 진실을 허구화했던 세태를 비판한다. 사진출처 리안갤러리 홈페이지

  일상과 분리돼 버린 예술에 도전한 이강소의 <선술집>(1973) 또한 아방가르드의 존재 목적을 잘 보여준다. 선술집은 조선 시대 말기부터 존재해 우리 민중의 일상에 빼놓을 수 없는 장소로 여겨진다. 이강소 작가는 직접 명동 화랑에 낡은 선술집을 차림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승호 교수는 <선술집>이 현실과 유리된 예술의 의미를 복구한다는 차원에서 아방가르드적 속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선술집>은 작품을 전시하는 곳인 화랑에 우리의 일상을 상징하는 선술집을 그대로 재현해 냄으로써 예술의 공간을 삶의 현장으로 전환했습니다. 일상과 예술의 분리를 향한 도전을 넘어 실천적 삶으로부터 유리된 예술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해당 작품은 한국 아방가르드 운동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와 같다고 할 수 있죠. 삶과 예술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본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강소의 ’선술집‘(1973)은 화랑에 선술집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당시 선술집은 젊은이들에게 현재의 카페와 같은 장소로, 민중의 일상을 상징했다. 이강소는 해당 작품을 통해 일상과 함께하는 예술의 의미를 구현했다. 사진출처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
이강소의 ’선술집‘(1973)은 화랑에 선술집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 당시 선술집은 젊은이들에게 현재의 카페와 같은 장소로, 민중의 일상을 상징했다. 이강소는 해당 작품을 통해 일상과 함께하는 예술의 의미를 구현했다. 사진출처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

  시간의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가치 
한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은 빠르게 변하는 시류 속에서도 가치를 더욱이 빛낸다. 그러한 이유는 한국의 아방가르드는 한국인의 민족적 감성,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초기 아방가르드적 속성을 지녔던 추상회화는 서구의 형식에서 출발한 예술임에도 역설적으로 우리 문화의 전통을 가장 잘 품고 있다. 한국의 실험적인 행위예술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끊임없이 결부된다는 점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세계가 주목한 ‘단색화’ 역시 초기 아방가르드 미술이었던 추상회화의 모더니즘 이론을 수용하는 동시에 한국적 색채를 더욱 가미한 장르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추상회화가 단색화의 장르로 발전한 사례를 들어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명했다. “우리의 추상회화는 한국 특유의 모더니즘 미술로서 단색화라는 고유한 하나의 장르로 발전했습니다. 대외적으로 ‘Dansaekhwa’란 고유 명칭을 통해 우리 문화적 정체성을 해외로부터 공인받은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죠. 이러한 사례는 앞으로 더욱 한국의 고유한 아방가르드 예술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폭을 넘어 행위예술을 행하는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예술적 힘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한다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죠.” 

  김승호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담론이 지속돼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첫 번째로 아방가르드는 단순한 미학적인 측면을 넘어 사회를 반영하고 있기에 아방가르드의 고찰은 인문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닙니다. 나아가 아방가르드 예술은 잘못된 사회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동시에 개인으로서 지녀야 하는 시대적 책무 또한 들여다보게 합니다. 또한 아직도 우리의 아방가르드 예술이 미학적으로 온전하게 탐구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의 담론이 꾸준히 계속돼야 하죠.” 

  아방가르드 예술은 사회 전반에, 때론 예술 그 자체에 허를 찌르는 반기를 들었다. 기존의 세상이 안주하며 유지하고 있었던 침묵에, 오늘도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위병들은 서서히 금을 내고 있다. 새로움의 가치가 저만의 고유함과 동반될 때 적막을 깨뜨리는 그들의 승리의 함성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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