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비평가이자 도시사회학자인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했다. “쇼핑몰, 오피스텔, 문화 아크로폴리스 등 오늘날의 고급 공공공간은 하층민 ‘이방인(Other)’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경고 문구들로 가득 차 있다. 보통은 환경이 인종 차별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의식하지 않지만, 가난한 라틴계 가족, 젊은 흑인 남성 또는 나이 든 노숙자 백인 여성들이 그 의미를 즉시 알아차린다."

  우리 사회의 경고 메세지는 이보다 더 명확하다. ‘8세 미만 어린이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 ‘60세 이상 어르신 출입제한’ 등의 문구가 그것이다. 노키즈존·노시니어존에서 ‘이방인’으로 정의된 아이와 노인은 마이크 데이비스가 언급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차별의 의미를 알아차릴 필요도 없이 명시적이고 공공연하게 거부된다.

  이러한 분리의 방법은 우리에게 어딘가 익숙하다. 우리는 이미 미국의 짐 크로우법이라는 사례를 알고 있다. 해당 법에 따르면 인종을 기준으로 식당이나 학교, 화장실, 극장, 버스 등 공공시설을 제한하거나 분리해도 된다. 짐 크로우법이 효력을 가진 약 80년의 기간 동안 유색인종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제한되고 백인들의 공간으로부터 분리됐다. ‘분리됐으나 평등하다’는 문장은 오랜 기간 인종 분리 정책에 면죄부를 줬다.

  과연 분리되어도 평등하기만 하면 괜찮을까.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브라운 대 토피카 판결을 통해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인종에 따라 공간 이용을 제한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라고 본 것이다. 노키즈존·노시니어존은 어떨까.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노키즈존을 차별행위라고 판단했다. 이유가 어떻든 노키즈존·노시니어존은 연령에 따른 시설과 서비스 이용을 제한하는 ‘차별’이다.

  시설과 서비스 이용을 제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설과 서비스의 실질적 소유자들이다. 미국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서비스와 시설을 운영하고 법률 결정의 권한을 가졌던 백인들,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가 아파트단지를 가로질러 가거나 놀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게 막는 아파트 소유자들,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해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공간을 분리하는 정부 등이다. 반면 이들의 이해에 따라 인종, 재산 소유 여부, 장애 여부라는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분리되어 제한되거나 거절당하는 사람은 분리 조치에 정면으로 대응할 힘이 없는 소수자인 경우가 많다.

  언젠가 큰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들의 이해에 따라 정한 기준으로 당신의 생활공간을 제한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차별이 아니라 그저 분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노키즈존·노시니어존이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분리 조치도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할까. 이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흑인차별의 역사 속에서 이미 배웠다. 내 땅 네 땅을 구분하는 땅따먹기 게임을 관두고 우리에게 주어진 땅에서 조화롭게 살아갈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홍예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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