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를 위해 신문을 펼쳤을 때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지면이 수많은 토론과 조정의 언어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대표적으로 비건 학식을 다루는 기사가 그렇다. 해당 기사에는 무언가 필요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방향성이 섬세하게 적혀 있었다. 여기에서 확실히 하고 가야 할 지점이 있다면, 내 놀람의 주체는 다만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같은 학생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 움직임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리라.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타인에 대한 앎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리라. 인간은 나로 태어나 나로 죽는다. 그러나 나 혼자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차이는 당연한 것이고, 다툼의 가능성을 늘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와 토론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내가 모르는 당신들에게 관심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대화가 성립할 수 있으므로.

  나는 태어나 의식적으로 비건 식생활을 실천해 본 적이 없다. 먹는 일에 크게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되려 그 식사 자리가 즐겁기까지 하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행동에서 신념과 선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타인의 행동에서 무형의 근거를 찾아낼 때 기쁘다. 당신에 대해 내가 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아서.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다.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살고자 하는지 알고 싶다. 세상에는 딱 '나'의 수만큼 '당신'이 존재하기에, 감히 내가 당신의 속내를 알아가고자 할 때 보다 즐거운 내일이 우리에게 올 수 있을 것 같다.

 

신나연 학생
문예창작전공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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