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니체는 “사람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남을 죽인다”고 말한다. 풍자(諷 刺), ‘풍자할 풍(諷)’과 ‘찌를 자(刺)’로 분해 된다. 즉 풍자는 바람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언제든지 상대를 찌를 수 있는 날카로 움을 지니고 있다. 이름에 담긴 뜻처럼 풍자는 민중의 쾌한 유희이자 든든한 무기가 돼주었다.

  역사와 발걸음을 나란히 한 풍자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을 반증하듯 풍자 미술과 역사는 늘 함께해 왔다. 특정 시기에 한정돼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버린 미술 장르와 달리 풍자 미술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조용하게, 때로는 파격적으로 그 존재의 맥을 이어왔다. 풍자 미술은 고대 그리스보다 앞선 청동기 시대 아시리아와 이집트에서부터 존재했다. 당시 화공들은 파라오나 신들까지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각각 파라오와 이집트 사람들을 상징하는 쥐와 고양이에게 연꽃과 부채를 바치는 모습은 당시 이집트인이 파라오에게 바쳤던 충성을 의미한다. 부와 명예를 과시해야 하는 장례 의식을 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공물을 바쳐야 하는 당대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위선이 가득한 사회일수록 풍자의 강도는 짙어졌다. 중세의 풍자 미술은 성스럽고 엄숙해 보이지만 실상은 타락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당대의 이면을 이야기한다. 중세 후기 유행했던 예술 모티프 ‘죽은 자 의 춤’은 페스트 창궐 이후 죽음 앞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주제다. 여러 계층을 대표하는 자들과 해골이 한데 어우러져 우스꽝스레 춤을 추는 이미지를 통해 신분 사회를 비판하는 풍자의 기능을 수행한다. 또 다른 풍자 미술로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바보들의 배>가 있다. 해당 작품은 은폐된 탐욕으로 점철된 중세 말 권력자들의 허식을 비꼰다. 성직자와 마주 보고 있는 수녀가 들고 있는 악기는 당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물속의 벌거벗은 두 노예는 배에 향락을 바치는 백성을 표상한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절대권력을 견제하는 시민 활동이 본격화된 만큼 민중을 대변해 더욱 신랄하게 세태를 풍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풍자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그의 작품 <가르강튀아>는 뚱뚱한 거인이 혀를 길게 내밀고 서민들이 바치는 곡식을 게걸스레 먹어 치우는 모습을 통해 루이 필리프 왕의 세금 정책을 비판한 작품이다.

  웃음을 통해 현실을 꼬집는 풍자 미술은 고대부터 끊임없이 주류 사회에 ‘불청객’으로 취급됐다. 오노레 도미에를 저속하다고 여긴 당대 화단뿐 아니라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의 수도원은 웃음을 인간의 적으로 여겼다. 안진국 미술평론가는 풍자 미술의 특성을 언급하며 기존의 학계와 종교계에서 풍자 미술을 경시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풍자의 전제는 강자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당시 학계와 종교계는 힘 있는 자들로 구성된 집단이기에 미술에 표현된 그들의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극도로 꺼렸습니다. 이러한 면모는 상부층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켰기 때문이죠.”

  예술에서의 풍자가 단지 개별 작품을 넘어 하나의 견고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된 시기는 반예술을 지향했던 예술운동 ‘다다이즘’ 부터였다. 안진국 미술평론가는 제1차 세계대전 말엽 탄생한 다다이즘 운동이 기존 권위적 체계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풍자와 맞닿아 있다고 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이 느낀 사회 체제에 대한 회의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는 반예술적 운동인 ‘다다이즘’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다이즘은 기존 엘리트 예술의 권위에 대한 전복을 꾀한다는 점에서 풍자의 의미가 내재 돼 있죠. 이는 오노레 도미에와 같은 현실을 드러낸 풍자를 넘어 기존 미술 자체에 대한 풍자로 확장된 것입니다.”

  현대의 미술가들은 레디메이드 형식과 같이 새로운 형식을 통해서 풍자의 메시지를 작품에 녹여내고 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비롯한 현대 작가들은 한 집단의 사회를 넘어 사회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와 예술과 같은 추상적 관념에 대해서도 점점 더 신랄하게 풍자한다.

  풍자의 웃음으로 엮은 우리 세상
  풍자 미술은 서구뿐 아니라 동방 세계에서도 오랜 역사와 함께했다. 『시경』에서는 ‘풍자’에 대해 “이를 말하는 자 죄 없으며 이를 듣는 자 훈계로 삼을 가치가 있다”며 그 어원을 설명한다. 이러한 권계적 성격이 강한 웃음을 담고 있는 풍자는 한국 예술의 흐름에서도 뚜렷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의 화폭에서도 풍자는 그 존재를 빛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을 시작으로 신분제가 해이해지고 가치관의 혼란이 온 사회의 단면은 풍자의 다양한 주제가 됐다. 당대 풍속화의 대표주자였던 신윤복은 변화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사대부의 폐쇄적인 윤리관과 체면치레의 이중성을 풍자했다. 그의 작품 <유곽쟁웅>은 유곽 앞에서 싸움을 벌이는 양반들을 그려냄으로써 지배층의 유흥문화를 비판한다.


  80년대 풍자 미술에서는 민중 개인의 경험을 통해 사회 전반을 향한 목소리를 내었다. 민중미술의 대표 화가인 홍성담의 <욕조-어머니 고향의 푸른바다가 보여요>➊의 경우 물고문이 성행했던 당시 독재 정권의 잔혹함을 폭로한다. 욕조에 고개를 묻은 아이는 바다를 보고 있는 듯하다. 이는 작가 본인이 고문당했던 자전적 경험이 사회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데에 활용된 80년대 한국 미술 속 풍자의 두드러진 형 태다. 

홍성담 작가의 '욕조-어머니 고향의 푸른바다가 보여요'는 독재정권 하 물고문을 당한 자전적 경험을 녹여냈다. 감상자는 아이가 바다를 보는 듯한 모습 속 당시 정부의 폭력성을 발견한다. 사진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홍성담 작가의 '욕조-어머니 고향의 푸른바다가 보여요'는 독재정권 하 물고문을 당한 자전적 경험을 녹여냈다. 감상자는 아이가 바다를 보는 듯한 모습 속 당시 정부의 폭력성을 발견한다. 사진출처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시대의 물살을 타고 전해진 풍자의 미학은 한국의 현대 예술가들에 의해 더욱 다채롭게 발현된다. 인간의 원초적인 심성에 주목한 최석운 작가는 민중 풍속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폭력성과 위선을 풍자한다. 최석운 작가는 <복날>을 통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의 잔혹함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우연히 ‘두들겨 죽인 살코기가 연하고 맛있다’라는 말을 듣고 난 후 실제로 개를 죽이는 현장을 목도한 순간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개고기 섭취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자리한 폭력적인 본성 자체를 조명하고자 했죠. 해당 작품에서는 개를 때려 죽이는 인간을 보며 또 다른 개가 보신탕을 끓일 솥에 오줌을 누고 있는데요. 이 개의 비웃음은 바로 인간 내면의 폭력성을 향한 풍자입니다.”  

  현대인들의 훔쳐보기 모티프를 활용해 인간이 지닌 위선을 희화화한 최석운 작가의 <지하철>➋도 풍자가 돋보이는 그림이다. 최석운 작가는 그림 속 인물들의 서로를 향한 곁눈질은 자기 세계가 없는 위선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려는 훔쳐보기 욕망은 어디에서나 일상화 돼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탄 지하철 맞은편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서로를 의식하며 쳐다보는 눈빛들에서 ‘시끄러움’을 느꼈는데요. 눈빛들이 오가는 찰나의 순간에서 훔쳐보고도 보지 않은 척하는 현대인들의 위선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최석운 작가의 '지하철'은 타인을 훔쳐보는 현대인들의 습관을 작품에 녹여냈다. 이는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하면서도 아닌 척하는 위선을 희화화한다. 사진제공 갤러리 아트리에 홈페이지
최석운 작가의 '지하철'은 타인을 훔쳐보는 현대인들의 습관을 작품에 녹여냈다. 이는 타인의 사생활을 감시하면서도 아닌 척하는 위선을 희화화한다. 사진제공 갤러리 아트리에 홈페이지

  현대 사회가 지닌 문제점을 소신 있게 담아낸 풍자는 화폭을 벗어나 조각 미술로도 존재감을 발한다. 빅터조 작가의 <갑과 을>➌에서는 상당히 불균형적인 힘의 구도를 지닌 두 마리의 강아지가 등장한다. 빅터조 작가는 해당 작품은 강자와 약자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갑을 관계의 문제점을 풍자한 것이라 전했다.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강자와 약자 사이의 도를 넘는 일방적 착취 관계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 버닝썬 사건이나 양진호 회장 갑질 논란과 같이 사회의 비리는 개인을 넘어 공권력의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죠. 작품에서 제복을 입고 있는 불도그에게 덜미를 잡힌 채 맨몸으로 저항하는 바우의 불균형적인 대립 구도는 갑을 관계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사회의 이면을 풍자하는 연출입니다.”

빅터조 작가의 '갑과 을'은 우리 사회의 갑을 관계 문제를 풍자한다. 경찰복을 입은 불도그와 그에게 덜미를 잡힌 바우는 강자와 약자의 불균형한 대립 구도를 형상화한다. 사진제공 빅터조
빅터조 작가의 '갑과 을'은 우리 사회의 갑을 관계 문제를 풍자한다. 경찰복을 입은 불도그와 그에게 덜미를 잡힌 바우는 강자와 약자의 불균형한 대립 구도를 형상화한다. 사진제공 빅터조

 

  단순하지 않은 웃음이 창조해 내는 것
  감상자에게 웃음 그 이상을 선사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풍자가 다른 장르의 예술과는 달리 갖는 차별점이며 곧 풍자의 존재 목적이다.

  안진국 미술평론가는 풍자와 코미디의 차이를 통해 예술에서의 풍자가 나아가야 할 길에 관해 언급했다. “풍자 미술과 코미디는 통념과 대치되는 표현의 낙차가 클수록 더 큰 카타르시스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자’라면 감상자에게 카타르시스 그 이상의 통찰력, 즉 깨우침을 줘야 하죠. 여기서 깨우침이란 기존 사회 체제에 존재하는 통상적인 가능성과는 다른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력을 지닌 풍자 작품은 웃음과 함께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기존 권위에 균열을 내고 결국 그 힘의 합산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죠.”

  이어 풍자의 대상은 ‘약자’가 아닌 ‘강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좋은 풍자 미술이란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과 전복 의지가 기저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풍자는 ‘약자’가 아닌 ‘강자’를 향하는 것이어야 함을 유념해야 하죠. 약자에 대한 풍자는 풍자가 아닌 ‘비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풍자는 날카로운 검이 되는 동시에 치유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빅터조 작가는 미술의 고유한 기능은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라 설명하며 풍자 미술의 방향성을 밝혔다. “미술은 누군가를 울릴 수는 없지만 웃 길 수는 있다고 확신해요. 의학적인 웃음 치료처럼 풍자 미술도 상처받은 감상자의 웃음을 유발하여 그들의 아픔을 위로합니다. 이를 인지하고 가령 ‘헬조선’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의 단면을 즐거움 속에 담아내는 것도 가치 있는 행보겠죠.”

  역사를 통틀어 풍자가 우리의 곁을 떠난 시간은 없다. 시대와 발걸음을 나란히 한 풍자는 더 나은 세상을 갈망했던 민중의 본성을 내비친다. 풍자 미술의 흔적과 미래를 온전히 지켜나가는 일이야말로 세 상을 부드럽게 변화시킬 수 있는 한 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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