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권사회학> 수업을 듣고 있다.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런 말들이다. 이제는 전 세계 누구나 인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왜 현실에선 이토록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또 다른 수업에서는 “내 평생 큰길로 한 번 못 다니고···”라던 강제동원 피해당사자 할머니의 말이 마음을 콕콕 찔러온다. ‘언어가 그 삶을 다 담을 수가 없다’는 말이 귓가에 선명하다.

  장애인인권위원회 폐지 문제와 ‘인권복지위원회 체제개편안’이 메인 기사로 실린 제2037호에 대한 비평을 쓰게 되며 마음이 무거웠다. 같은 호에는 인권센터의 2022 인권보고서 브리핑, ‘강제동원 해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진행된 수요시위에 관한 기사도 실려 있었다. 각기 다른 장면들에 등장하는 인권이라는 단어에 대해 유독 생각하게 되었다.

  인권에 대한 모든 말은 아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말과 현실의 불편한 차이를 실감할 때야 우리는 정말 인권이 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장해야 한다’는 미래지향적 다짐이 아니라, 지금 보장되지 않는 그 한 가지를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장애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인권을 말할 수 있을까? 장애인권, 교육권, 성평등, 기후위기는 하나의 이름일까. 약 900명이 서명해 만든 인권기구가, 장애학생 당사자의 의견수렴도 없이, 구체안도 없는 채 개편돼야 했다면 행정적 이유가 모두에게 그만큼 중요해야 하는지 더 숙의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된 장소 밖에서 들리지 않는 말들이 마음을 찌른다.

  희망이 너무나 쉽게 느껴질 때면, 우리에게 무언가가 조금 더 어렵게 느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묻게 된다. 우리의 말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의 말은 어디쯤 있는지 말이다.


윤설 학생
사회학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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