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6월 7일, 음반 사전 심의 제도가 철폐되었다. 드디어 자유로운 창
작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한 착각이다. 음반 사전 심의 제
도의 대체품이라 할 수 있는 방송 사전 심의제가 그 총대를 대신 메고 버티
고 있어서이다. 다수의 대중가수가 방송적합용 가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출연
을 금지당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음악계의 현실은 언더그라운드의 젊은 음
악인들에게는 발붙이기에 낯설기만 하다.

작년에 이어 지난 4일부터 시작된 97자유 콘서트는 그래서 다르다. 그저
노래하기를 보여주는 보통의 콘서트는 말 그대로 콘서트이다. 그러나 97자유
콘서트에는 목적이 있다. 생각이 있고 뜻이 있다. `대중음악에 희망을'이라
는 큰 주제를 바탕으로 젊은 대중음악가들로부터 한국 음악의 미래를 모색해
본다는 변화적 의지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올해에는 수익금 전액을 북한 동
포돕기에 쓴다는 목적까지 덧붙였다. 학생들이 구호와 대자보와 시위로 투쟁
을 한다면 이들은 노래로 그들의 노래를 위한 투쟁을 이어 나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콘서트가 진행된 고려대학교 노천극장은 오후 7시부터 밤 11시 늦은 시간
까지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함성은 커지고 흥분은
더해갔다. 대부분의 관중이 집으로 가는 차가 끊길 시간이었지만 전혀 아랑
곳하지 않았다.

한국 메탈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크래쉬가 제일 먼저
무대에 올라 `최후의 날에'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텔레비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그들의 폭발적이고 위력적인 음악에 관중들은 더욱 열광했다. 한
국 메탈의 대들보인 크래쉬는 콘서트의 첫머리에서 관중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자기몸에 앉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의자들의 마음을 만족
시켜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어나 뛰고 소리쳤다.

그 뒤를 이어 이미 텔레비전 방송에서 욕설을 하고 침을 뱉는 등 자유를
만끽하다 출연금지를 당한 삐삐롱스타킹이 등장했다. 여전히 예전의 자유로
운 행동으로 관중을 이끌었다. 관중은 그런 행동들 조차 음악을 위한 자유로
보았다. "우리는 양아치고 또라이고 씨발놈"이라는 그의 말처럼 음악을 하는
데는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었
다.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은 모두 음악이다'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흥분된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히며 민중의 벽을 넘어 자유를 노래하는 노동
가요의 대표자 꽃다지가 97자유 콘서트에 가세했다. 다른 어느 가수보다도
노래의 자유에 제약을 많이 받은 이들이어서 더욱 열정적인 무대가 되었다.
노래의 자유와 더불어 노동해방의 자유를 노래하는 꽃다지의 무대는 어느 가
수의 무대보다도 힘이 넘쳤다. 출연자중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한영애씨의
노래가 나오자 관중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함께 부르기도 하였다.

97자유 콘서트의 문을 닫는 무대는 락그룹 시나위가 맡았다. 사회에 대한
저항의지와 사회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들로 논란을 일으
킨 바 있는 그들은 앵콜까지 하며 열기를 끝까지 이어갔다. 시나위의 기타리
스트 신대철씨는 음악적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관중속으로 몇번이나 뛰어
들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위해 눈물을 흘리고 피를흘린
다. 우리는 노래의 자유를 위해 눈물과 피를 흘리는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하
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무대위로 뛰어올라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댔다. 흥
에 겨운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억압된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몸짓과도 같았다. 그리고는 관중속으로 힘껏 몸을 던졌다. 자유를 향한 돌파
구를 찾아 뛰어들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
에서 이번 97자유 콘서트는 노래만 있는 무대가 아닌 자유를 무대에 올린 공
연으로 성공적이었다.

<김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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