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ChatGPT)가 연일 화제다. 텍스트를 그럴싸하게 생성하고 인간과 특정 주제로 꽤 오래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진 AI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한때 AI가 가장 늦게 대체할 것으로 예견되었던 시를 전공한 데다 그 흔한 운전면허도 없는 아날로그 인간이지만,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챗GPT와 AskUp을 사용해 보았다. 그 결과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번역에는 꽤 쓸모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거짓을 진짜처럼 보이게 엮어내는데 능란해서 철저한 검증을 거치지 않으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SNS를 전혀 하지 않는다. 2013년부터 몇 년간 페이스북을 하다가 소통하려고 시작한 SNS가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거나 특정한 정보만 제공한다는 생각에 페이스북 계정을 폭파하고 SNS를 끊어버렸다.

  보이는 나를 의식하기보다는 나를 들여다보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좀 더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착각이 만들어 내는 관계에 안주하고 싶지 않은마음도 있었다. 물론 피로도가 높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기는 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좀 느려지긴 했지만, 들려올 소식은 어차피 들려오기 마련이고 덤으로 마음의 평화를 얼마간 찾기도 해서 지금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이기로부터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내게 AI가 시를 쓰고 시인들이 AI와 협업해 시를 쓰는 세상은 여전히 낯설다. AI의 창작 능력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나는 어디쯤에서 어떤 태도로 AI와 함께 살아갈 세상을 맞이 해야 하는 걸까?

  작년에 시 쓰는 AI ‘시아(SIA)’가 『시를 쓰는 이유』라는 시집을 냈다. 시를 쓰는 주체로서 AI 시인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는 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를 쓰는 이유를 묻지 말”라거나 “나는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하거나 “영원히 인간이 되고 싶었”지만 “나는 사랑이 되지 않기 위해/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비인간 주체와 함께 살아갈 날이 머지않았음을 실감하기도 했다.

  내가 만들어 가는 시 수업 강의실은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곳이다.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시보다 재미있는 콘텐츠는 얼마든지 있고 시를 읽지 않고도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어쩌면 시를 읽는다는 것은 조금은 더 세상을 복잡하게 보고 낯설게 보고 느리게 보는 일이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살아가는 일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시를 읽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속도와 불화하고 그래서 문득 어디 먼 데로 가고 싶어질 때 비로소 시를 읽을 이유가 생기는 것이겠다.

 

이경수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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