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이어서 그들이 사민당원들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다./(중략)/이어서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은/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처음 그들이 왔을 때> 中

  여러분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 사회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은 요? 그에 앞서, 괴로워하는 생판 남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있으신가요?

  근래에는 광장에서 터져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손쉽게 집단 이기주의로 치부되는 듯합니다. 때로는 소음공해, 때로는 교통체증으로 여겨지기도 하죠. 공통점은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유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일 경우 이런 경향성은 더욱 심해지죠. 아직도 퀴어 퍼레이드는 혐오와 무관심 속에서 그저 ‘변태적이다’라는 인식만을 뒤집어쓰고 있으니까요.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구성원들의 공유된 규범과 네트워크, 신뢰 등을 포괄해 사회적 자본이라 부릅니다.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이 발표한 ‘2023 레가툼 번영 지수’에 따르면 올해 우리나라의 사회적 자본 지수 순위는 세계 167개국 중 107위로 하위권에 속했죠. 안타까운 점은 이번 성적이 2013년 95위에서 10년 사이 12단계가 하락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파편화돼 가고 있는 것이죠. 개인주의라는 미명 아래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처음 그들이 왔을 때>의 마지막 구절이 자꾸만 연상됩니다. 반복되는 각자도생의 끝에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결말이 그려지거든요. 더불어 많은 이들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로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이 지속되고 반복된다면 이는 단순한 일부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전세 사기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큰 사고를 당해 후천적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중앙대를 다니는 학생 중 대부분은 노동자가 될 것이며 우리는 모두 시간이 지나면 노인이 되겠죠. 사회 구성원이 겪는 고통은 우리도 언제든지 겪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고통받을 수도 있는 미래의 우리를 위해 대신 힘써주고 있는 셈이죠.

  그들과 함께 광장에 나서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공감하려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말하는 이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은 곧 여러분을 위한 일이 될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권오복 대학보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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