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는 ‘전시가 끝나고 난 뒤’ 작품과 더 넓은 세상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번 호는 서울에 상륙한 풍자의 대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를 담아봤는데요. 풍자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시대와 발걸음을 같이한 풍자의 이야기와 함께 한국에서 그려진 비릿한 웃음의 세계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엄정희 기자 rlight@cauon.net

희망을 줄 것,
겁내지 않을 것,
기대치는 낮게 유지하기.
무엇보다, 최정상에 오르는 걸 목표로 삼지 말기.
-마우리치오 카텔란 『W』 인터뷰 中


세상엔 수많은 가치가 존재하며 그 가치에 따라 값이 다르게 매겨지곤 한다. 3980원짜리 바나나가 있는가 하면 1억 5000만원짜리 바나나도 있다. 예술이라는 가치를 등에 업은 바나나에는 여러 말꼬리가 달라붙었다. “바나나를 작품이라 내건 놈이나 그걸 1억 5000만원이라고 책정한 놈들이나…”, “나도 어제 바나나 5개 거실에 붙여놨다, 7억 벌었다.” 풍자 위에 올라 바나나에 1억 5000만원이라는 가치를 불어넣은 마우리치오 카텔란. 그의 예술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할까.

  부조리의 희극을 무대 위로
  마우리치오 카텔란, 그는 현재 미술계 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논란도 많은 예술가다. 그는 조각가이자 행위예술가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섭렵하면서 그 속에 풍자의 메시지를 담아 왔다. 카텔란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현대미술계의 악동 혹은 이단아, 뒤샹의 후예, 사기꾼, 광대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그는 수식어 이상의 예술을 토해낸다.

  그가 현대 미술계의 악동이라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악동의 사전적 의미는 ‘장난이 심한 사람’이다. 카텔란은 벽에 바나나 한 개를 덕트 테이프로 붙이며 예술이라 외쳤고 전시를 기획한 갤러리스트를 벽에 바나나처럼 테이프로 묶어놨다. 나아가 전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옆 갤러리의 작품과 가구를 훔쳐 와 전시하기도 했다. 어느 곳으로 향할지 모르는 그의 예술은 처음 마주했을 때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묘한 끌림을 지닌다. 카텔란의 또 다른 수식어는 뒤샹의 후예다. 마르셀 뒤샹은 개념 미술의 선 구자이자 ‘레디메이드’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 예술가다.

  뒤샹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남성 소변기를 전시한 <샘>이 있다. 이를 시초로 본래의 일상적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는 개념 미술이 시작됐다. 뒤샹의 개념 미술은 카텔란으로 이어졌다. 뒤샹과 개념 미술 그리고 레디메이드라는 장르적, 표현적 공통점을 지닌 카텔란은 뒤샹의 후예라고 불리며 풍자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카텔란의 대표적인 개념 미술 작품은 <코미디언>이다. ‘바나나 작품’으로 알려진 해당 작품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바나나 하나가 1억 5000만원이라는 것, 썩어 사라지는 바나나가 작품이 된 것 등에 관한 의문이 이어졌다. 이에 카텔란은 자신은 바나나를 판 것이 아니며 작품 인증서를 판매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작품의 의미가 필요한 현대 미술에서는 선 몇 개가 몇억 원을 호가하기도 그 자체가 고상한 장르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카텔란의 ‘바나나’, <코미디언>에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담겨 있기에 1억 5000만 원이라는 가치를 호가할 수 있을까. 해당 바나나는 현대 미술 그 자체를 내포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평가 기준 없이 주관적인 잣대와 작가 이름이 곧 가치가 되고 돈으로 환산되는 미술계의 민낯을 공개한 것이다.

  카텔란의 전시는 다양하면서도 주관적인 의문으로 하여금 관람객들이 작품 이면에 담긴 의미를 깨닫도록 하며 때로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어렵고도 난해한 현대 미술에 발을 들이는 시작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세계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에 위치한 리움미술관에서는 카텔란의 예술 세계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첫 국내 전시이자 2011년 그가 은퇴를 선언했던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이후 최대 규모의 개인전이다. <WE>라는 제목의 전시회는 카텔란의 작품 중 <우리(We)>라는 작품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관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번 전시는 카텔란의 작품을 통해 억압, 불안, 권위 더 나아가 ‘우리란 무엇인가’에 관한 생각과 함께 모종의 연대를 가능케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곳곳에서 카텔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실제 노숙자처럼 보이는 <동준과 준호>가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그들을 본 관람객은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동준과 준호>를 보고 놀랐던 것은 그들이 노숙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술관에 노숙자가 있기 때문일까.

  전시장 곳곳에 자리 잡은 비둘기도 관람객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를 담당한 김혜연 리움미술관 큐레이터는 전시장의 비둘기가 지닌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비둘기들은 항상 집단으로 등장하며 전시의 장소적, 시의적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유령>으로 불리는 비둘기들이 미술관 곳곳에서 조용하지만 강렬하고 섬뜩한 존재감을 행사하며 작품을 감상하러 온 관람객을 도리어 관찰합니다.”

사진 엄정희 기자
사진 엄정희 기자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바닥에서 관람객을 훔쳐보는 듯한 카텔란을 묘사한 작품 <무제>를 만날 수 있다. <무제>는 관람객의 감상 대상이 됨과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관람객 또한 카텔란의 관람 대상이 된다.

  김혜연 큐레이터는 <무제>가 카텔란의 작품 세계를 대변한다고 해석했다. “카텔란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제>는 미술계의 침입자이자 외부인으로 불렸던 카텔란의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규율을 끊임없이 뒤집으려 시도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해석할 수 있죠.”

'그'는 앳된 소년의 몸이지만 나치의 수장이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히틀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몸, 기도하는 손짓은 관람객들에게 불편한 모순 감정을 선사한다. 사진 엄정희 기자
'그'는 앳된 소년의 몸이지만 나치의 수장이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히틀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얼굴과 몸, 기도하는 손짓은 관람객들에게 불편한 모순 감정을 선사한다. 사진 엄정희 기자

 

  이어 보이는 작품 <그>는 풍자란 무엇인지, 비극적인 웃음은 무엇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뒷모습은 앳된 소년 같아 보이지만 얼굴을 보기 위해 앞으로 가면 히틀러와 마주하게 된다. 무릎을 꿇고 어딘가에 기도하는 듯 손을 모아 잡은 히틀러의 모습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불편한 모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전시회 속 붉은 카펫 위에는 운석을 맞아 쓰러진 교황, <아홉 번째 시간>이 있다. 김혜연 큐레이터는 <아홉 번째 시간>에 담긴 의미를 전했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모습은 종교적 지도자이자 바티칸 시국의 원수를 대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설정을 적용한 것입니다. 작품은 스위스 쿤스트할레 바젤, 런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 바르샤바 자헹타 국립미술관에 차례로 전시되며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종교 단체의 거센 항의를 마주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 작품은 특정 종교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보이든지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권력, 권위, 우상 등에 대한 논쟁과 토론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전시되는 곳의 사회적 맥락, 그리고 관람자 개인의 배경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일으킬 테죠. 이 것이 바로 <아홉 번째 시간>이 갖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숨'은 풍자가 아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감정을 전달한다. '아홉 번째 시간'은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등장시킨다. 이는 단순히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권위에 대한 논의를 일으킨다. 좌측 사진 엄정희 기자 우측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숨'은 풍자가 아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감정을 전달한다. '아홉 번째 시간'은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을 등장시킨다. 이는 단순히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권위에 대한 논의를 일으킨다. 좌측 사진 엄정희 기자 우측 사진 제공 리움미술관

 

  풍자만을 말하지 않는다
  
카텔란의 예술 세계는 ‘풍자’ 하나만으론 규정지을 수 없다. 카텔란은 작품 <숨>을 통해 풍자와는 또 다른 공감을 자아냈다. 검은 바닥 위 함께 웅크려 누워있는 강아지와 사람은 서로의 숨을 확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김혜연 큐레이터는 <숨>이 풍자 이외의 감정을 전한다고 설명했다. “<숨>은 이탈리아 루카의 대성당에 있는 조각을 닮아있습니다. 이 조각은 고이 누워있는 여성과 주인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주인의 발치에 자리 잡은 개를 보여주죠. 카텔란은 이 기념비를 봤던 경험, 그리고 주무시는 부모님께 다가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던 어린 시절에 비추어 이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카텔란은 미술사의 다양한 요소들을 참고하면서도 그것을 비트는데 이 작품에서는 웅크린 남성과 힘 없이 누워버린 개가 원작을 대신했죠. < 숨>은 단순 기념비적 의미를 넘어 섭니다. 두 존재의 유대감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두려움, 기다림, 희망 등 복잡한 감정을 전하고 있죠.”

  카텔란의 작품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작품을 바라보는 장소와 시간,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작품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은 본인의 작품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 카텔란의 태도도 한 몫 한다.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일상에서 우리가 탐구할 수 있는 것이 무한한 것처럼, 그의 작품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여러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카텔란의 진지함과 엉뚱함, 뻔뻔함은 때로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당황을 넘어서면 우리는 제3의 눈으로 다양한 세상을 풍요롭게 또 신랄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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