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문화부는 태양의 자손, 잉카족을 클릭해 봤습니다.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안데스 일대를 지배한 잉카제국은 무구한 영광을 지닌 문명의 흔적을 남겼죠. 잉카족의 사회 경제구조는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살아갔는데요. 그러나 오늘날 잉카의 공동체 의식은 깨져버린듯 합니다. 원주민과 엘리트의 간극은 반정부 시위라는 결과를 초래했죠. 과거는 찬란했지만, 오늘날 국가적 혼란을 맞이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 봅니다. 엄정희 기자 rlight@cauon.net

숨을 제대로 고르기조차 어려울 만큼 높은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잉카족은 찬란한 문명의 숨을 내뱉어왔다. 고도의 척박 속에서 피워낸 악착은 멸망해버렸으나 그들이 남긴 문명만큼은 그 맥을 꾸준히 이어 오고 있다.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땅과 구름이 맞닿는 지점에서 이들이 빚어낸 문명의 결을 들여다봤다.

  떠오르다 저물어버린 태양처럼
  잉카족, 케추아족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믿었 다. 곳곳에 내리쬐는 태양처럼 안데스 전역을 호령했던 잉카족의 한 세기는 영광과 아픔을 고이 눌러 담고 있다. 잉카제국은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늘날 에콰도르에서 칠레까지의 영토를 아우르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신정환 교수(한국외대 스페인어통번역학과)는 잉카제국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가 사회의 통합과 평화를 추구한 통치에 있다고 전했다. “잉카제국의 황제들은 타국을 정복한 후에도 관대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과부, 병자, 노인을 마을에서 돌봐주는 사회안전망 시스템은 잉카제국의 통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죠.”

  태양신 아래 잉카제국은 100여 년의 짧은 영광을 누렸다. 잉카제국은 대항해 시대 서구인에게 조명된 새로운 탐험지였다. 잉카제국은 약 8만 명의 정예군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탐험가 피사로의 군대 단 168명에 완전히 무너졌다.

  신정환 교수는 잉카제국의 멸망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따른다고 설명했다. “잉카 제국의 몰락에는 왕실의 내분과 무기의 열세, 유럽에서 들어 온 전염병의 확산 등 여러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잉카제국은 왕에 절대권력이 집중된 구조였기 때문에 외부의 위기 대응에 취약했다고 볼수 있죠.”

  유럽의 정복자들이 몰고 온 천연두 또한 잉카제국을 쇠락으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스페인군과 함께 잉카의 땅을 밟은 천연두는 면역체계가 없는 잉카족에게 전쟁보다 더한 사망률을 안겼다. 1532년 11월, 잉카의 사람들은 스페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잉카제국의 백년천하는 그렇게 태양의 저편으로 저물었다.

  문명의 일광(日光)은 영원하리
  백 년이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잉카족의 문화는 다채로움 그 자체였다. 스스로를 태양의 후예라고 명명한 잉카족은 태양을 결코 단순한 자연물로 여기지 않았다. 잉카족에게 있어 태양은 제국을 넘어 인세의 기원으로서 숭배됐다.

  잉카족의 태양 숭배 사상은 태양신에게 한 해의 풍년을 비는 태양제 ‘인티라이미’로 이어진다. 인티라이미는 새로운 봄맞이 전 연중 가장 해가 짧은 동짓날에 진행된다. 축제의 주최자는 제국의 절대권력자였던 왕이었다. 왕은 청결한 몸으로 태양신을 맞이하기 위해 축제 7일 전부터 단식을 감행한다. 인티라이미의 절정은 왕이 단칼에 죽인 라마의 심장을 끄집어내 하늘 높이 치켜올리는 순간이다. 잉카족은 꺼낸 라마의 심장에서 뿜어나오는 피의 색으로 한 해 농사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공양이 끝난 이후 한 달 동안 역동적인 춤과 노래와 함께 축제를 이어갔다.

태양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린다. 축제는 왕의 행렬과 함께 성대하게 시작한다.
태양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린다. 축제는 왕의 행렬과 함께 성대하게 시작한다.

  『라틴아메리카역사 다이제스트 100』의 저자 이강혁 작가는 잉카족이 인티라이미에서 라마를 제물로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잉카족에게 라마는 교통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죽과 고기, 농작물의 비료를 제공하는 요긴한 동물이었죠. 이러한 라마는 잉카족에게 인간 다음으로 소중한 존재였기에 이를 바쳐 태양신에게 풍작을 빌었습니다.” 신정환 교수는 인티라이미에서 라마의 심장을 꺼내 올리는 절차의 의미를 밝혔다. “꿈틀거리는 싱싱한 심장은 생명의 원천인 ‘피’를 동반합니다. 피는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는 태양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희생제물이었죠.”

  잉카제국의 공식 언어였던 케추아어는 기록 문자가 아니었기에 잉카족은 먼 곳에 소식을 전하거나 기록이 필요한 상황에 매듭을 묶는 방식인 결승문자 ‘키푸’를 사용했다. 정승희 중남미 문화전문가는 잉카족이 소통 수단으로 매듭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잉카의 땅은 여러 종의 자생 목화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쉽게 직조가 가능한 환경이었던 만큼 키푸를 만들어 기록의 방편으로 사용했죠.”

  잉카족이 남긴 고도화된 문명의 정점은 단연 마추픽추라 할 수 있다. 마추픽추는 구름이 서릴 정도로 높은 산악에 세워진 도시였기에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지 못하고 그 가치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이 강혁 작가는 마추픽추의 구조와 건물에 대해 언급했다. “마추픽추는 크게 주거지역과 종교 지역으로 정교히 나뉩니다. 마추픽추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은 ‘인티와타나’인데요. 인티와타나는 태양을 끌어 들이는 자리라는 의미로 잉카족은 해마다 인티와타나 돌기둥 바로 위에 떠 있는 태양을 붙잡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는 농사에 필요한 날씨를 예측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했을 거라 추정되죠.”

  해발고도 2400m가 넘는 곳에 화강암을 끌어 올려 지은 도시 마추픽추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할 만큼 신비하다. 잉카족의 불가사의한 저력을 통해 후대의 우리는 마추픽추가 보존하는 시대를 초월한 건축 기술과 그 자체의 고고학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제국은 단명했으나 그 문명의 가치는 오래도록 빛나고 있다. 영토의 정복이 곧 정체성의 정복으로 귀결되진 않았다. 오늘날에도 잉카족은 다양한 문명의 흔적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잉카족이 그들 역사의 굴곡과 문명의 가치를 잊지 않는다면 잉카의 가슴속에 떠오른 태양은 그 일광을 영원토록 비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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