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라는,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감정에 관해 생각해 보자.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과정은 두 가지로 귀결된다. 먼저 외부에서 비롯되는 부끄러움이 있다. 우리는 이를 ‘수치심’이라 부른다. 이때의 부끄러움은 특정 환경에서 요구되는 개인의 능력과 관계된다. 그리고 ‘죄책감’이라는, 내부 요인에 기인하는 부끄러움도 있다. “했어야 했는데” ·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와 같은 말은 당위에 직결되며 이는 양심의 산물이다.

  전자는 제3자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는 과정이고 후자는 한 시점을 둘러싼 과거와 미래의 ‘나’가 당시의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기에, 두 개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감정이 만들어진다. 다만 앞선 과정들에서 사회라는 요소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전제는 공통적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사실은 부끄러움이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지점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부끄러움을 느꼈는지에 대한 여부는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다.

  최근 들어 부끄러움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몇 사람들이 대신 알려 줬다. 지난 6일, 대통령실은 강제징용 문제를 두고 국익을 운운하며 자신들의 회피책에 대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 자찬했다.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을 능력이 없어 수치심을 느껴야 할 사람이 가지는 자부심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3·1절에 일장기를 걸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장기를 게양하는 게 무슨 위법이고 불법이기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책감 없는 당신이 외치는 법적 책임처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세상이면 차라리 좋겠다. 모두가 무정한 세상이라면 아프지 않아도 될 사람이 적어도 대신 아프진 않을 텐데 말이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누군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의지 부정이라기보다는 능력 부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지각하면서 변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부끄러움, 그 수치심이 그들에게는 없다. 위 두 경우는 부끄러움의 부재로 인한 참사다.

  부끄럽지 못한 자들은 무지한 당당함이 폭력임을 보여준다. 사과는 돈이 아니라 무엇보다 부끄러운 반성의 마음이 완성한다는 것을 모르며,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에 대해 배워야 한다. 다행히 대부분은 성찰과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사람의 말을 분별해낸다. 세상과 만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할까.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 사회와 동떨어져서.
 

박주형 대학보도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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