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선언하는 것이다”

꼭 아름다워야만 하는가

‘추’가 있기에 ‘미’도 존재한다

역경 속에 피어난 꽃의 진가
  
아름다운 줄만 알았던 예술계에 파장이 닥쳤다. 배설물과 죽음, 혈의 형태로 감히 예술의 반열에 오르고자 한 추한 것들. 역설적으로 이들은 추했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 전통 미학 체제의 전복을 꾀하고 당당히 추함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주장한 이들은 아브젝트다.

키키 스미스의 '탄생'은 여성이 사슴의 질로부터 나오는 기괴한 형상을 그려낸다. 이는 기존 여성의 탄생을 묘사한 작품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풍기는 미적 분위기와는 대조된다. 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키키 스미스의 '탄생'은 여성이 사슴의 질로부터 나오는 기괴한 형상을 그려낸다. 이는 기존 여성의 탄생을 묘사한 작품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풍기는 미적 분위기와는 대조된다. 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아브젝트, 예술계의 이단아
  아브젝트 예술의 기폭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광신적인 애국주의와 신제국주의로 점철된 전쟁은 많은 이들의 소외와 고통을 양산했다. 참사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그저 새로운 야만의 형태에 불과했다. 신봉해왔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짙은 회의는 예술가들의 섬세한 감성과 결합했다. 이는 다양한 형식과 의미를 추구하는 예술 담론을 생성했다.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예술 형식이 바로 ‘아브젝트’다.

  이재걸 미술 평론가는 1·2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에 새로이 가미된 폭력성은 당시 사회의 광기를 반영한다고 전했다. “전쟁 이후 예술은 혐오감과 반감을 미학적 도구로 사용해 저항적인 방식으로 사회 비판의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들 작품의 폭력성은 개인에 가해진 사회의 폭력만큼이나 강렬했죠. 누군가의 비명 크기는 그를 때린 힘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처럼요. 아브젝트 예술은 이러한 ‘비명’의 일종으로 사회 질서에서 배격된 것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저서 『공포의 권력』에서 아브젝트 이론을 최초로 설명했다. 아브젝트란 주체의 일부이지만 완전한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위협이 되는 요소를 의미한다. 배설물이나 침, 정액, 생리혈을 예시로 들수 있다. 이는 인간이라는 주체 안에 속해있으면서도 비천한 것이라 간주돼 주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척되기 때문이다.

  아브젝트 개념과 함께 언급되는 아브젝시옹은 주체가 아브젝트를 추방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봤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브젝 트는 주류 사회나 질서에서 부적절하다고 여겨져 추방된 소수자와 집단 모두를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브젝트 이론은 개인 혹은 사회의 권력에 의해 소외와 억압을 경험하는 ‘작은 존재들’에게 시선을 돌린 철학적 접근인 것이다.


  아브젝트 예술을 최초로 선보였던 ‘키키 스미스’와 ‘신디 셔먼’을 비롯한 현대미술 작가들은 절단된 시체를 연상시키는 조각이나 신체의 분비물을 작품의 재료로 활용했다. 과거 비평가들은 역겹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여전히 아브젝트는 누군가에겐 그저 혐오스러운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시각적인 ‘추(醜)’의 지평 너머에 존재하는 ‘미(美)’의 은밀한 세계를 미처 보지 못했다.

  ‘추의 미학’은 역설이 아니다
  ‘추는 악하며 미는 선하다’라는 명제는 더 이상 성립 되지 않는다. 오히려 추를 통해 미를 말함으로써 미와 추의 이분법적 구도가 무너지고 있다. 17세기 예술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그림 <채찍질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예수는 기둥에 결박된 채 모진 채찍질을 당한다. 육체적 고통이 담긴 추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고통을 이겨낸 예수의 모습은 관람객들에게 희생의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짙어지는 추의 향연 속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추를 마주하며 혐오와 매혹을 동시에 경험한다. 현대인들은 사회에서 금기시되거나 자신을 경계 짓는 것들과 관련하여 ‘일탈을 향한 호기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추에 매혹되면서 동시에 이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한효석 교수(인천대 조형예술학부)는 추함의 미학이 지닌 의의를 전했다. “예술이 무조건 어떠해야 한다는 정의는 없습니다. 예술세계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아름답지 않지만 존중받아 마땅한 우리 주변의 것들처럼 추해 보이는 예술이더라도 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의 비중 또한 큰데요. 전쟁의 살상을 담은 그림에서 생명과 평화의 존귀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그 예시죠.”

  아브젝트 예술 역시 고전의 아름다움이 아닌 추의 방식으로 억압된 존재를 조명하며 예술의 의미를 다한다. 김도아 박사(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는 아브젝트 예술은 배척당한 타자에게 새로운 차원으로 접근한다고 설명했다. “아브젝트 예술은 ‘미’에 대한 보편적 범주에서 벗어나 ‘추’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합니다. 타자를 충격적인 이미지로 불러오며 대중들이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죠. 이는 주체 안의 신성한 것과 비속한 것의 경계를 허물며 존재 스스로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기도 합니다.”

  아브젝트의 목소리가 필요한 세상
  아브젝트 예술은 정형성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반항해왔다. 이는 20세기 이전 미술에서 묘사된 관능적이고 성스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신체의 모습을 구현하며 전통적 미의 기준을 타파했다.

  이재걸 미술 평론가는 마네의 작품을 언급해 여성의 몸이 아브젝트로서 갖는 의미에 관해 설명했다. “보통 우리는 미의 기준으로 <밀로의 비너스>를 떠올리곤 하죠. 여성의 몸이 현실과는 다른 관능적 환영으로 상상됐다는 사실은 여성의 몸이 대상화됐던 사실을 반영합니다. 19세기 마네의 <올랭피아>는 일반적인 미의 기준을 반영한 전통적 누드로 여성의 신체를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서구 남성들에게 충격을 줬는데요. 마네에게 전통적 누드의 ‘미’는 그저 역사의 장식이었을 뿐이죠.”

  아브젝트 예술의 대가 키키 스미스는 <탄생>을 통해 옛이야기를 모티프로 새롭게 탄생하는 여성상을 나타냈다. 동일하게 여성의 탄생을 표현한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는 극히 다른 시각이다. <비너스의 탄생> 속 여성은 바다에서 태어나 조개껍데기에 담긴 채 나타난 ‘아름다움’의 표상임에 반해 <탄생>은 여성이 사슴의 질에서 탄생하는 기괴한 이미지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추의 예술이다.

  역사의 아픔을 겪은 타자들을 상기시킨 작품도 존재한다. 자메이카 출신 미술가 르네 콕스는 비천한 존재로 취급됐던 흑인 여성들의 자아를 위로하고자 했다. 대표작 <호텐토트>는 당시 인종차별의 희생양이었던 남아프리카의 사르키 바트만을 패러디한 사진 작품이다. 작품의 모티프가 된 사르키 바트만은 특이한 몸매를 가졌다는 이유로 파리와 런던에서 나체로 전시됐다. 사진 속 콕스는 자신의 몸 위에 거대한 유방과 엉덩이 모형을 부착함으로써 흑인 여성이 역사적으로 겪은 타자화의 아픔을 드러냈다.

르네 콕스의 '호텐토트'는 작가 자신의 몸에 유방과 엉덩이 모형을 부착하고 찍은 사진 작품이다. 특이한 몸매를 가졌다는 이유로 나체로 전시됐던 남아프리카 여성 사르키 바트만을 모티프로 했다. 사진출처 researchgate        
르네 콕스의 '호텐토트'는 작가 자신의 몸에 유방과 엉덩이 모형을 부착하고 찍은 사진 작품이다. 특이한 몸매를 가졌다는 이유로 나체로 전시됐던 남아프리카 여성 사르키 바트만을 모티프로 했다. 사진출처 researchgate        

  한국의 아브젝트 작품으로는 정희정 작가의 <Rumor>가 있다. 작품 뒤쪽에는 두명의 여고생의 일상적 풍경을, 작품 앞쪽에는 시체를 배치해 삶과 죽음을 동시에 표현했다. 김도아 박사는 작품명과 관련해 해당 작품 내 아브젝트를 설명했다. “작품의 제목 ‘루머’는 허공에 떠 있는 흩어진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과도 같죠.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나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요. 그러나 작가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삶의 끝에는 죽음이라는 아브젝트가 놓여 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효석 교수의 작품 <자본론의 예언>은 돼지의 사체에서 풍겨오는 추함으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한다. 해당 작품은 배가 불러 젖이 튀어나온 어미 돼지와 그의 살갗을 파고든 새끼의 모형으로, 농장에서 죽어간 돼지의 사체를 본떠 만들었다. 한효석 교수는 해당 작품이 혐오의 이미지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전했다. “인간에게 강제로 도축되는 돼지는 후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논리를 문제시합니다. 동시에 관객에게 인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유토피아를 맞이할 수 있는지 생각하도록 하는 의도가 담겼죠.”

  아브젝트는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돼 온 것의 목소리를 담는다. 이재걸 미술 평론가는 아브젝트 예술은 성찰의 매개가 된다고 전했다. “누군가는 아브젝트 예술을 불쾌를 옹호하는 불경한 발상으로 인식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존재론적 결핍과 소외를 극복해야 하는 우리는, 인간과 역사를 깊은 철학적 성찰로 이끄는 아브젝트의 신비한 힘에 주목해야 합니다.”

  김도아 박사는 특히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브젝트 예술의 담론이 필요한 이유를 강조했다. “한국 사회는 소비자본주의적인 요소로 인해 ‘타자 만들기’가 만연해졌습니다. 치열한 생존 경쟁과 낙오에 대한 불안은 다른 존재를 배척하도록 했는데요.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타자를 살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 방식 중 하나가 ‘아브젝트 예술’이죠. 추함을 통해 주류 사회가 비주류라고 규정한 것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장을 만들어내는 아브젝트 예술은 우리 삶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척하며 유지되고 있는지 알려줍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차별과 소외로 지금도 경계 밖을 맴돌고 있는 ‘작은 것’들에게 아브젝트 예술은 저만의 거친 목소리로 그들을 위한 시를 읊는다. 누군가에게는 역겨운 목소리일지라도 그것으로나마 소외된 존재를 알릴 수 있다면, 그 ‘역겨운’ 목소리는 기꺼이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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