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낙하 상태의 물체는 목적지가 불분명하다. 어디가 출발점이고 낙하지점인지 모른 채 낙하자는 계속해서 공기의 역행을 타고 흐른다. 목적지의 불분명함과 자신에 대한 불신은 우리에게 늘 두려움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곧 자유로운 삶을, 방향을, 관념을 제시한다. 고착화된 삶의 방향을 벗어나면서 말이다.

  경계 없는 공간으로부터
  서울특별시(서울시) 중구 덕수궁길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전시회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가 열렸다. 해당 전시는 세 개의 목차 ‘이야기의 조건 : 너머의 내러티브’, ‘배회하는 자아’, ‘자유낙하 : 생동하는 에너지’로 구성돼 있다. 모두가 정해진 하루를 매일같이 살아내는 서울시 한복판에서 키키 스미스는 자유낙하를 외쳤다.
  
  보통의 전시는 관람객이 정해진 동선에 따라 정해진 작품을 감상하도록 기획된다. 그러나 이 전시는 전시 공간 내부가 곡선으로 이뤄져 있어 관람객이 순환적 동선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정해진 것 없는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 이러한 감상 방식은 키키 스미스가 말하는 자유낙하의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전시회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나 체로 서 있는 민머리 여성 청동 조각상 <메두사>다. 관객이 알고 있는 메두사는 뱀의 머리카락을 가진 채 그녀를 바라본 사람을 돌로 만드는 마녀다. 그러나 전시에서 마주하게 되는 메두사는 뱀의 머리칼을 갖지도 마주한 사람을 돌로 만들지도 않는다. 키키 스미스가 자신의 몸을 본떠 만든 조각상일 뿐이다. 그녀는 일반적인 메두사의 모습이 아닌 정말 평범한, 있는 그대로인 인간의 몸으로서 여성의 신체를 구현하고자 했다.

  해당 전시를 담당한 이보배 학예사는 <메두사>는 키키 스미스의 예술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메두사>가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스미스는 해당 작품에서 ‘메두사’라는 틀을 입기 이전의, 그저 평범한 한 여성이자 인간으로 대상을 마주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진 엄정희 기자
작품 '메두사' 사진 엄정희 기자

  평면으로 구현된 입체적 사유
  관람객을 맞이하는 <메두사>를 지나면 판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신체 근육을 세세하게 묘사해 판화이지만 조각 같은 느낌을 주는 <꿈>부터 나뭇가지를 든 채 무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나체 여성 그림 <무제(여자와 나뭇잎)>까지.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 신체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자유낙하>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여인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여인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평온한 것인지 찡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낙하의 장면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작품은 바닥에 전시돼 있어 어디로 낙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목적지가 불분명 한 자유낙하의 의미를 표현하는 작품이다.

  이보배 학예사는 <자유낙하>가 지닌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설명했다. “자유낙하는 하나의 작품명을 넘어, 키키 스미스의 40여 년에 달하는 작품활동 전반을 묶어냅니다. 자유낙하라는 단어는 수직 하강의 움직임과 달이 지구를 맴도는 공전을 떠올리게 하죠. 자유낙하는 키키 스미스가 ‘정원 거닐기’에 빗대어 강조했던 배회의 움직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결국 <자유낙하>는 수직과 수평의 축을 모두 아우르면서 작가의 다채로운 활동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작품인 것이죠.”

  벽면을 따라 걷다 보면 다소 폭력적인 인상을 주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흑백 사진 11점으로 이뤄진 <라스 아니마스>다. 해당 작품은 키키 스미스가 직접 포즈를 취하고 촬영을 진행했다. 작품 중앙에 위치한 2점의 사진 속 키키 스미스는 나체다. 하지만 연약한 인상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강렬한 눈빛과 진취적인 몸짓으로 공격적인 인상을 남긴다. 기존 여성 누드화는 성적인 요소와 굴곡진 몸매, 정적인 곡선을 주로 담았으나 <라스 아니마스>는 짐승과 같은 강렬한 모습을 보여준다. 키키 스미스는 이 작품에서 털과 주름, 핏줄, 상처를 가감 없이 의도적으로 확대하고 강조한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감상의 대상이 됐던 여성의 신체를 해방하고자 했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끝없는 생각을 거듭하게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직관적인 메시지에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이번 전시 도록 제작에 참여한 이진숙 작가는 낯선 이미지의 경험은 더 넓은 이해를 가 져온다고 전했다. “오로지 충격을 주기 위해서 낯설고 추한 것을 끄집어낸다면 그것은 좋은 작품이 아닙니다. 그런 작품은 오래 기억되지 못하죠. 좋은 작품은 한 단계 나아갑니다. 익숙함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순간은 불안하고 불쾌할 수 있지만 그를 통해서 새로운 생각과 감각을 경험할 수 있죠. 이는 더 넓은 세계의 이해로 이어집니다.”

작품 '라스 아니마스' 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작품 '라스 아니마스' 사진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배를 갈라 나가자
  어릴 적 한 번쯤 읽어본 <빨간 망토> 이야기에는 할머니를 집어삼킨 늑대와 늑대의 배를 가르는 사냥꾼, 그리고 빨간 망토 소녀가 등장한다. 만일 할머니가 직접 늑대의 배를 갈라 나왔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됐을까.

  키키 스미스는 작품 <황홀>을 통해 여인이 늑대의 배를 갈라 나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비록 늑대의 배에서 나온 것은 할머니가 아닌 성인 여성이지만 그런데도 여성의 진취적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황홀은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화려함을 뜻한다. 해당 작품의 제목이 황홀인 이유도 진취적인 여 성의 태도는 눈이 부시게 찬란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짐작해본다.

  관람객 김지혜씨(31)는 전시를 보고 난 후의 감상을 전했다. “키키 스미스가 젊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작가 본인이 가졌던 생각들을 순수하고 솔직하게 풀어낸 점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판화, 조각 등 다양한 장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풀어낸 점도 인상적이에요. 아티스트 활동에서조차 경계를 없앤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아 편안하게 즐기기 좋은 전시였던 것 같습니다.”

  관람객 서양화가 최연욱씨(45)는 키키 스미스 작품과 전시의 가치를 말했다. “현대미술은 대개 어렵습니다. 우리가 굳이 어떤 한 사람의 아픈 과거를 형상화한 작품을 봐야 하나, 왜 우리가 그걸 보고 이해하려 힘써야 하나 싶기도 하죠. 그러나 이 전시회를 보며 그녀의 아픔을 통해 보는 관객인 우리 내면에 감추었던 아픔을 돌아보고, 그녀가 아픔을 치유한 과정을 따라 함께 치유를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시회 전체를 한 점의 작품으로 본다면 난해한 현대미술은 치유가 되기도 하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에 반감 혹은 불편함을 느낄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 시야를 가지기에 앞서 우리가 왜 불편함을 느끼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키키 스미스 – 자유낙하>는 관람 내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신체 묘사에 반감을 느꼈던 당신도 전시를 감상하며 그 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분명 찾게 될 것이다.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 작품의 공간 속에서 자유낙하의 무정형을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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